(4521) 경성야화-제86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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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36년이었던가 나는 초선어학회에서 개최한 10월 28일의 한글날 기념식에 참석해 우연한 기회에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되었다.
그날에는 각 신문사 기자들이 초청되어 조선어학회 회원을 합쳐 모두 30∼40명이 저녁때 명월관에 모여 있었다.
도산이 일반 화합에 나오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모두들 가슴을 설레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도산이 학회 간부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방에 들어오자 우리들은 일제히 일어나 인사했다.
중키에 보통 체격이고 얼굴빛은 누르고 흰 편이며 이마는 벗겨졌고 안경을 썼었다.
언뜻 느껴지는 인상이 독립투사라기보다는 근엄한 중학교 교장같이 보였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조용하게 보료 위에 앉았고, 멀리 종로경찰서 삼륜 경부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흘겨보면서 앉아있었다.
식이 시작되자 사회자는 도산 선생이 오늘 이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이야기하고 간단한 축사를 하게되었다고 소개했다.
도산은 조용히 일어나 낮은 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분하게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데 차츰 음성이 커지고 열을 띠는 듯 싶었다.
이것이 1908년께 평양에 있는 대성학교에서 또는 청년학우회를 이끌고 전국방방곡곡에서 열변을 토해 민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던 그 열변이로구나 하고 우리들은 자못 황홀해 듣고 있었다.
도산의 음성이 점점 피치를 올려서 가경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별안간 삼륜 경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우시(중지)!』하고 소리쳤다.
그 순간 도산은 이야기를 뚝 끊고 흥분을 누르는 듯 잠시 서있더니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별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중지 시켰다고 청중들은 술렁댔지만, 노련한 삼륜 경부는 이야기가 돌아가는 형세로 보아 험악한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막아버린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도산의 면모에 접하고 그의 웅변을 들은 최초이자 최후였다.
도산이 별세한 뒤 태평양전쟁 중에 우리들은 근로보국대로 징발되어 평양 부근에 있는 흑령탄광에서 1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강서의 고분을 보고 오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길을 송태산장 쪽으로 인도했다.
강서는 도산의 고향이고, 송태산장은 도산이 감옥에서 나와 기거하던 집이었다. 순사가 그곳을 지키고 있어 사람들이 얼씬은 못하니 멀리서 바라만 보고 가라고 했다. 그것이 벌써 50여년 전의 일인데 지금 송태산장이 어떻게 되었을까.
수양동우회원을 검거한 다음 해인 1938년 2월에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별안간 형사를 풀어서 윤치영·구자옥·장택상·안재홍·유억겸·최두선 등 수십 명의 민족주의자를 검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흥업구악부 사건이다.
흥업구락부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윤치호·이상재·신흥우 등 민족진영의 지도자들이 민중계몽과 국산장려를 표방하며 조직한 단체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동지회와 연락해 민족주의자들이 결속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총독부에서는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 다음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흥업구락부를 뿌리뽑으려고 덤빈 것이다.
흥업구락부의 중심인물은 윤치영이었다. 종로서의 삼윤 고등계주임과 함께 악명 높은 수등 고등계주임이 혹독하게 윤치영을 문초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확증을 얻어내려고 하였지만 윤치영은 끝내 이를 부인했다.
이 소문이 동경에까지 가 귀족원 의원인 판곡과 관옥이 경성으로와 미나미 총독에게 『조선의 민족주의자를 다 죽일 테냐』고 힐난하는 바람에 총독도 어쩔 수 없이 6월에 검거했던 전원을 석방했다. 미나미 총독의 정치고문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시오바라란 자로 처음에 비서관으로 있다가 뒤에 학무국장을 지낸 미나미의 심복으로 미나미와 똑같은 거칠고 난폭한 자였다.
또 한 사람은 미다라이라는 신문기자 출신의 파쇼 정치 신봉자로 마구 덤비는 사려분별이 없는 자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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