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의 화려한 변신 아카데미를 '그린 쇼'로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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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주제가상 등 2관왕에 오른 ‘불편한 진실’의 주인공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左)이 ‘디파티드’의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함께 무대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LA AP=연합뉴스]

"올해 아카데미 색깔은 그린이었고, 주인공은 앨 고어(58) 전 미국 부통령이었다."

제7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를 담은 고어의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 장편 다큐멘터리상과 주제가상을 거머쥐자 영화 전문가들은 이런 평가를 쏟아냈다.

역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함께 시상식장에 나타난 고어는 "이번 시상식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그린 환경 쇼'가 됐다"고 선언했다. 그는 디캐프리오에게 "환경 문제의 동료가 돼 줘 고맙다"고 인사했으며, 디캐프리오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처할 뛰어난 지도자가 있어 영광"이라고 화답해 관중의 큰 박수를 받았다. 고어는 더 이상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억울하게 승리를 놓친 '비운의 정치인'이 아니었다. 신념이 확고한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그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불편한 진실'에서 "저는 앨 고어입니다. 하마터면 미국 대통령이 될 뻔했습니다"는 조크로 시작한 그는 이번 무대에서도 재치를 발휘했다. 디캐프리오가 "할 말이 있을 텐데요"라고 하자 그는 "여기서 이렇게 밝힐 의도는 아니었는데 수십억 인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좋은 기회군요"라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대선 출마 선언이라도 할듯이 "미국인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앞으로 제가…"라고 말하는 순간 음악이 흘러나왔고 관중은 일제히 웃음으로 답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흔히 연출되는 코미디 쇼였다.

사회자 엘렌 드제너러스도 그를 특별하게 소개했다. 그는 "고어가 여기 있습니다. 미국이 그에게 표를 던졌고, 그리고… (일이) 매우 복잡합니다"며 그의 대선 패배를 안타까워하는 농담을 던졌다.

데이비스 구겐하임 감독과 함께 시상식 단상에 오른 고어는 "미국 시민 여러분, 지구 온난화와 환경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구겐하임 감독은 "지난 30년간 환경 문제에 헌신해 온 고어가 이번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줬다"며 그에게 공을 돌렸다.

워싱턴 포스트(WP)는 26일 고어의 수상 소식을 전하며 "2000년 대선 때 대법원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편을 드는 바람에 패배했지만 그 패배를 유머로 넘길 줄 아는 고어가 이번 수상으로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하루 전 WP는 '고어는 록 스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가 이 영화를 알리는 과정에서 록 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고어는 WP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열정적인 분위기는 인상적"이라면서도 "그러나 나는 레드 카펫이 마루 깔개(rug)에 불과하다는 걸 알 만한 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 주관을 잃지 않고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고어는 또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서 크게 감동받고 생각이 바뀌었으며, 지구 보존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느꼈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 로리 데이비드는 "고어의 인기는 부통령 때보다 지금이 높다"며 "그는 지금 수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영화배급자인 존 레셔는 "함께 일하기에 이렇게 좋은 사람은 없었다"며 "그는 약속한 것을 꼭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구겐하임 감독은 "그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그를 록 스타처럼 열렬하게 대접했다"고 말했다. 이달 초 그가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강연할 때는 온라인 티켓 판매가 시작된 지 3분 만에 2만3000명이 몰리기도 했다.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시상식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다시 대선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LA=주정완 기자, 서울=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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