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 70년만에 복원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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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일제 강제 철거… 이달중 고증 조사반구성/민비시해범과 싸우다 숨진 8명위해 세워
일제가 민족혼 말살을 위해 없애버렸던 장충단이 70여년만에 옛모습을 되찾게 된다.
서울시는 3일 서울 장충동 2가 197 장충단공원내에 위치해있다 일제때 강제 철거된 장충단을 비롯,사당등 부속건물을 원형대로 복원키로 결정하고 내년초부터 복원공사를 실시키로 했다.
서울시는 이를위해 이달중 서울시 문화재위원·서울시사편찬위원·역사학자·주민등으로 고증을 위한 조사반을 구성,장충단의 정확한 위치·형태·규모 등을 밝혀내기로 했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인자객들에게 살해당했던 을미사변당시 일본인자객들과 맞서싸우다 순직한 훈련대연대장 홍계훈등 8명의 충절을 기리기위해 고종의 특명으로 세워진 제단이다.
홍계훈은 일본자객 1백여명이 명성황후 민비를 암살하기 위해 경복궁으로 들이닥치자 광화문앞에서 홀로 맞서다 총을 맞고 쓰러진후 사지가 절단됐으며 궁내부대신 이경식등 숙직하던 신하 7명도 민비를 맨몸으로 보호하다 숨졌다.
고종은 5년뒤인 1900년 9월 이들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군영인 남소영이 있던 장충동에 석축제단을 쌓고 사당을 건립토록했으며 장례원은 매년 봄·가을 두차례 제사를 지냈었다.
고종은 또 이 제단을 「장충단」으로 부르도록 친필휘호를 내렸으며 당시 육군부장이던 민영환이 비문을 써 제단앞에 장충단비를 세웠다.
그러나 한일합방직후인 1910년 일제는 가장 먼저 장충단제사부터 중단시켰다.
『남산밑에 지어진 장충단 저집/나라위해 몸바친 신령뫼시네/태산같은 의리에 목숨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장한 그분네.』
일제는 제사금지조치이후 서울 장안에 이같은 내용의 한양가가 유행하자 1919년 아예 장충단비·사당 등을 철거,이 일대에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 수백그루를 심어 아예 공원으로 둔갑시켰다.
사당은 폐쇄된 채로 방치되다 6·25때 소실돼 현재로서는 당시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게 됐다.
이후 서울시는 1969년 일제가 호텔신라 뒤편 산등성이에 버린 장충단비를 찾아내 현재의 공원입구로 옮겨 세웠을뿐 지금까지 단한차례의 복원계획도 없이 일제가 조성한 공원형태를 그대로 유지해왔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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