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512)불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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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l932년 무렵에는 불경기가 대단해서 취직이 몹시 힘들었다.
법과를 졸업하면 총독부 관리나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제일인데 관리는 예산긴축으로 뽑지못했고, 은행도 혹심한 경제공황으로 신규채용이 드물었다.
이때문에 취직할데가 없어서 모두 놀고 있었다.
유명한 이야기로 나보다 2년선배인 2회 졸업생 이효석의 일화가 있다. 그 역시 취직이 안되어생활할수가 없었다.
제일고보 물리학선생을 하다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총독부경무국 도서과장이 된 구사부카(초심)라는 옛날 선생이 이효석을 딱하게 보아 도서과 검열관으로 채용하였다., 그때 이효석은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편에 서있는 작가가 일제에 협력하여 프로문학을 탄압하는 직책인 도서검열관이 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처자를 데리고 당장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어쩔수 없이 도서검열관이 되었다.
보름쯤 다니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이효석은 종로 큰길거리에서 비평가 이갑기를 만났다.
이갑기는 이효석을 보더니 별안간 노기가 등등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효석은 여기에 큰 충격을 받아서 도서과장에게 사표를 내고, 처자를 데리고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가버렸다.
얼마뒤에 그곳의 경성농업학교 영어선생이 되었다.
이만큼 취직이 어려웠던 때였다.
1932년 2월10일 아침에 나는 구두시험을 받으려고 영문과 연구실로 들어갔다.
주임인 사토(좌등)교수릍 비롯해서 데라이(사정), 나카시마(중도)교수가 차례로 앉아있었고, 영국인 교수 하워드는 자리에 없었다.
내가 첫번째 자리인 사토교수앞에 앉자마자 교수는 댓바람에 소리를 버럭지르면서 『자네는 왜, 흥분하는 거야. 무엇때문에 흥분하는거냐 말야!』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것같아 무슨 일인가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 반제동맹인가 하는 패들하고 자네는 한패지? 그 사람들하고 한패면 정정당당하게 나서지 이게 무어야. 블레이크 이름을 빌려서 혁명사상을 선전한단말야. 대체 이게 논문이야, 선전삐라지!』 사토교수는 논문을 책상위로 팽개쳤다가 집었다가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문제의 논문은 영국의 18세기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중편시에 관한 것이었다. 블레이크가 프랑스혁명에 심취해서 극구찬양하고, 붉은 모자를 쓰고, 런던시내를 활보하던 모습을 일부러 과장해서 썼다고 사토교수는 화를 내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중편시에는 혁명을 찬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귀절이 많았다.
내가 지나치게 이것을 부연하고 역설한 것이 때가 때이었던만큼 사토교수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었다.
교수는 혁명을 찬양했다고 생각되는 귀절을 붉은 줄로 표시해 놓고, 일일이 지적하면서 야단쳤다.
『요컨대 자네는 「파나틱」이야. 혁명 「파나틱」이란말야. 나는 낙제시킬 수 밖에 없어!』
사토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짓고 논문을 데라이 교수에게 돌렸다. 나는 열이 빠져서 데라이교수에게로 갔다.
데라이 교수는 내가 하도 무참하게 당하는 것을 동정했던지 몇마디 문법상의 잘못을 지적하고 끝냈다. 나카시마교수는 그때 영국유학에서 갓 돌아왔던 때라 내가 당하는 것을 보고 딱했던지 역시 얼른 끝내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교수실을 나왔다.
낙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네 선생이 각각 점수를 낸 것을 평균한 것이 성적이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주임교수가 최후까지 낙제를 고집하면 어떻게 될는지 걱정이 되었다.
종일 불쾌하게 지내다가 밤에 데라이 선생집을 찾아갔다. 사토교수는 시를, 데라이교수는 소설을 강의했는데 두 선생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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