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미스틱 리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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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나오는 대사로 말문을 열자면, 어른이라고 다 어른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때로는 흡혈귀에 물린 것처럼 회복이 쉽지 않다. 하물며 그것이 범죄로 인한 것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미망의 늪이라면 어른일수록 빠지기 쉽다. 5일 개봉하는 '미스틱 리버'는 범죄가 남긴 깊은 상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무섭도록 힘있는 드라마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스릴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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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스턴의 별 볼일 없는 동네 골목에서 세 소년이 함께 놀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 형사를 사칭한 변태성욕자들이 접근한다.

그들에 납치됐다 나흘 만에 탈출한 소년은 물론이고, 무기력하게 현장을 지켜본 다른 두 소년에게도 이 흉악한 범죄는 벗어나기 힘든 그늘을 드리운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저마다 가정을 꾸린 세 사람은 예기치 않은 살인사건으로 다시 만난다. 잡화점을 운영하는 지미(숀 펜)의 딸이 총상을 입은 시체로 발견되고, 형사가 된 숀(케빈 베이컨)이 사건을 담당한다. 어린 시절 납치사건의 희생자였던 데이브(팀 로빈스)는 살인이 벌어지던 밤 강도와 격투를 벌였다며 피투성이가 되어 귀가한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발품을 파는 숀의 수사과정에서 는 지미의 과거가 하나둘 드러나고, 데이브의 행적에는 의심이 더해진다.

영화는 범인 맞히기 게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저질러진 범죄의 파장으로 미칠 듯한 분노와 불안.무력감을 겪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이름만 들어봐도 누구 하나 처지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는 액션도, 특수효과도 없는 화면에서 눈길을 떼기 힘들게 한다. 눈빛은 불타는 데 시원스러운 통곡 한번 뱉어내지 못하는 지미를 연기하는 숀 펜을 필두로 세 배우는 절제된 연기의 조화를 통해 긴장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스릴러물의 뼈대를 갖춘 이 영화에도 반전과 복수는 있다. 그러나 반전은 '요건 몰랐지'하는 표정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대신 육중한 비극의 무게로 관객을 압도한다. 빼어난 연기는 세 남자의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로라 리니(숀의 부인)는 같은 날 개봉하는 로맨틱 코미디 '러브 액츄얼리'에서와는 1백80도 다른 연기로 관객을 섬뜩하게 한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상처투성이 어른들이 지어놓은 가정이라는 성채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자신의 성채만을 지키려는 어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실감하게 한다.

데니스 르헤인의 소설이 원작인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물네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배우로서의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년)의 총잡이나 '더티 해리'(71년)의 막가파 형사 같은 마초적인 남성상을 통해 스타로 부상했다. 감독으로서의 그는 자신을 스타로 만든 장르 영화의 도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살을 입혀내는 작업을 통해 거장의 솜씨를 확인시킨다.

'미스틱 리버'의 현실에는 더 이상 '더티 해리'처럼 불법도 불사하는 마초가 영웅으로 설 자리가 없다. 대신 어린 시절 납치범의 차 뒷자리에서 친구들을 돌아보던 데이브의 눈길처럼, 세월의 강이 씻어내지 못하는 상처가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명성은 더욱 오래갈 전망이다. 올해로 73세의 거장이 오래도록 손발을 맞춰온 제작진을 물흐르듯 이끌며 겨우 39일 만에 찍었다는 이 영화에 미국 언론은 벌써부터 아카데미상을 들먹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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