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시되면 배고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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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실장을 비롯해 본관4인은 현위치에 앉아 식당에서 날라다주는 국수그릇을 비웠죠, 김실장은 집무실 책상위에 국수그릇을 놓고 식사를 했어요. 칼국수도 아니고 대개 기계로 뽑은 가는 국수인데 젓가락 몇번이면 바닥이 보이는거죠. 간혹 짜장면도 있었는데 김실장이 「대통령 계시는 건물에 짜장면 냄새가 진동해서야 되겠느냐」고 해 그것도 없어졌지요.
가끔가다 한달에 한두번 양식이 나올때가 있었어요. 육여사께서 외부손님을 초대하면 양식을 대접하곤 했거든요. 그러면 그날은 오후 내내 속이 든든했지요.
국수가 쉬 꺼져 오후 서너시쯤 배가 고프면 과자따위로 속을 달래기도 했는데 일이 바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퇴근시간까지 참는거예요. 대통령부속실의 젊은 직원들은 주방을 기웃거리며 누룽지를 찾기도 했어요.』
신장 1m75cm의 든든한 체구인 김실장도 국수 한그릇으로 오후 내내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비서실장업무란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어서 체력이 뒷받침돼야하는데 아무래도 국수로는 부족한게 많았던 모양이다. 김실장은 75년부터 좌골신경통을 앓아 무척 고생했는데 그 자신도 업무스트레스와 체력저하 때문이라고 보고있다.
김실장은 『배고픈줄도 모르고 일했던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이라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만 국수로 점심을 때웠던게 아니예요. 내 전임자인 이후낙실장때부터 박대통령이 그렇게 해왔거든요. 박대통령은 식사에도 무척 검소해 국수와 보리밥을 즐겼으니까요.
물론 배고팠죠. 그러나 어디 배고프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나요. 일이 계속 쏟아져 정신이 없었는데….그리고 대통령도 그렇게 잡수신다고 생각하니 불만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김실장은 『마음으로는 그랬지만 육체는 따라오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75년부터 좌골신경통이 생기는 거예요. 차츰차츰 상태가 나빠지더니 비서실징 그만 두기전 1년반정도는 정도가 심했죠.
통증때문에 잠을 못이루는 때도 많았고 의자엔 앉지도 못해 서서 결재하곤 했어요.
내 집무실에 있을때는 그래도 자세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사정이 나았는데 박대통령을 모시고 회의할때는 무척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의전비서실에 부탁해 대·소 회의실내 내가 앉는 의자에는 딱딱한 합판을 깔아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대통령집무실내에 있는 소파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장관등이 보고할때 내가 배석하곤 했는데 그때는 아무리 아파도 꾹참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죠.
박대통령한테 말씀드렸더니 점심시간을 이용해 명동성모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다녀 어느 정도 통증은 없어졌는데 그래도 완치는 안됐었거든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78년12월에 비서실장을 그만 두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허리가 깨끗해지는거예요. 비서실장할때는 매일 아침 샤워할때마다 머리털이 빠지곤 했는데 그 증상도 싹 없어지고요.』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대개 운명을 공유해야하는 것처럼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사사로운 일상사부터 국가대사에 이르기까지 동고동락하는 사이임에 틀림없다.
특히 「한솥점심」을 먹었던 김실장은 땀을 뻘뻘 흘리는 더위까지도 같이 나누려고 했다고 한다.
71년부터 88년까지 청와대행정관·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최규하·전두환 세대통령을 거쳤던 김두영씨(전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차장)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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