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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하는 기업들(속빈강정­한국경제: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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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술장벽 높아 첨단제품 개발한계/유통 시장 개방까지 겹쳐 이중고
지금까지 외국의 경기가 나쁘면 내수가 살아나 나름대로 뒷받침해주었고 국내경기가 안좋으면 월남특수·중동건설붐등 해외에서 돌파구가 생겨나 그럭저럭 꾸려온 한국경제였다. 『올상반기까지만 해도 걸프전에 따른 중동특수,유럽지역에선 통독특수,중국·동구등 사회주의국가의 개방에 따른 북방특수등 3대특수에 의해 우리수출이 두자리수 성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3대특수는 벌써 사라져가고 하반기에는 지도를 놓고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특수를 기대할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금성사 김영환 수출기획과장의 말이다.
이처럼 국내기업 실무자들은 당장의 어려움보다 앞으로 닥쳐올 눈에 보이는 위기를 더 우려하고 있다.
삼성전자 박상진 수출전략 기획부장은 『해외시장에서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다 국내 유통시장까지 열려 솔직히 내우외환입니다. 앞으로 국내 기업들은 되도록 출혈을 줄이면서 살아남기위한 경쟁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선 실무자가 피부로 느끼는 감각으로는 아마 2∼3년내에 국내 거대기업중 몇개는 무너져내릴 가능성이 큽니다』고 우려했다.
박부장은 특히 90년대 들어 외국주요기업의 경영전략변화를 눈여겨 보아야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IBM·GE등 대기업들은 최근 80년대 유행처럼 번지던 「첨단기술 개발」이라는 슬로건을 버렸다. 첨단기술을 개발하는데 위험부담이 높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신 독점이윤을 누리는 기간이 갈수록 짧아지기 때문이다.
대신 해외대기업들은 「보다싸게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독점이윤기간을 늘리자」는 새로운 경영전략을 내세웠다.
이것이 이른바 「거대기업끼리의 기술합작」이다. 세계시장에서의 경쟁기업끼리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해 신기술개발에 따른 위험부담을 줄이고 다른 기업의 추격을 따돌리는 한편 독점이윤은 훨씬 많이 누리겠다는 뜻이다.
이같은 경영전략에서 IBM이 애플사와 손잡고 GM이 도요타와 합작했다. 이는 기술장벽이 한층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무역협회 신원식 조사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돈으로 기술을 사오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최근 외국기업들의 합작을 보면 원천기술이 있는 기업끼리만 손을 잡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방·조립기술만 발달된 국내기업들로서는 세계기업의 재편성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에서 신기술을 들여와 낮은 국내 임금과 결합,생산품을 수출해온 국내기업들은 이제 기술도입이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셈이다.
이같은 개별기업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 차원에서 한국이 세계전략에 뒤떨어지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많다.
무역진흥공사 이광기 정보조사본부장은 『미국·일본·유럽공동체(EC)들의 지역통합 움직임은 무역장벽을 높인다는 평면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안된다. 그것은 곧 배후생산기지의 확보라는 각국가의 세계경영전략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지적한다.
즉 미국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멕시코를,일본은 20년전부터 동남아를,유럽은 EC통합을 확대해 동구를 배후생산기지로 삼고있다는 뜻이다.
고부가가치·기술집약적 산업은 본국에 두되 노동집약적 산업은 임금이 싼 배후생산기지에서 생산,국제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한국상품은 벌써 이런 선진국의 배후생산기지에서 만드는 상품에 밀리는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동남아에서 생산된 일제는 세계시장에서 국산보다 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고 미국시장에서는 멕시코산제품이 우리상품을 추월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기업 실무자들과 경제전문가들중 일부는 이같은 점을 우려,우리경제의 기본전략이 질적으로 바뀔때가 아니냐는 조심스런 의견을 내놓고 있다. 즉 선진국을 따라잡는 전략에서 대만이 일본의 하청생산기지로 전환한 것처럼 「국제적 하청계열화」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비관적 전망인 것이다.
이들은 그룹내의 어느 한기업이 큰 이익을 남기면 그 업종의 기술개발에 투자,세계 일류상품을 만들기보다는 신규투자나 부동산매입쪽으로 방향을 잡는 관행이 남아있는한,또 최근 무역적자에 대한 정부의 변명처럼 『수출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수입을 늘려야한다』는 구조적 모순이 계속되는한 한국경제는 질적 도약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더많은 사람들은 아직 「한국의 저력」을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이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경제의 질적변화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렵다는데 대해 의견을 같이 한다.<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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