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joins.com] 어! 내 남편 얼굴이 왜 이래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나는 오랫동안 시력 2.0의 수퍼우먼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아무도 보지 못한 도로표지판을 제일 먼저 읽고 안내해 주면 동승한 이들이 감탄하곤 했다. 그러던 내 눈이 이상해졌다. 눈이 찌르듯 아프고, 잘 안 보이고, 두통까지 생겼다. 햇빛이 너무 센 호주에서 살았던 탓일까? 안과에 가니 시력이 좋던 사람은 노안도 빨리 온단다. 결국 호주의 날씨 때문이 아니라 내 나이 탓이었다.

몇 년 전 사기 싫었던 돋보기를 마련했다. 일단 사두긴 하지만, 뭐 쓸 일이야 설마 많겠어! 이렇게 미워하며 모셔뒀던 돋보기를 공부하던 아이들이 잠들고, 뉴스에 매달리던 남편도 코 고는 어스름한 새벽녘에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은근슬쩍 끼어봤다. "왜 이리 작던 글씨가 크고 시원하게 잘 보이냐? 허, 참…" 뺐다 끼기를 반복하며 감복했다.

곧이어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다. 어머나 세상에나! 어제 청소기를 돌리고 깨끗이 치웠다고 자부했던 부엌 바닥에 웬 머리카락들이 텍사스 사막에 마른 덤불 굴러가듯 굴러다녔다.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행주로 닦았던 밥통 위에 묻은 고춧가루와 잔 먼지, 그리고 싱크대 주변의 깔끔하지 않은 물때들도 눈에 확 들어왔다.

가슴이 쿵 내려앉아 물 마시는 것도 잊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난 아이들에게 철저히 제 주변을 치우라고 잔소리하던 엄마였다. 아이들은 엄마가 관리하는 집안의 청결상태가 엉망인 걸 알면서도 한마디 항거도 없이 잔소리를 묵묵히 감내했던 것인가. 남편도 이렇게 지저분한 여자와 지금까지 불평 한 마디 없이 살아왔던 것인가. 또 "당신 머리카락 좀 흘리지 마!" "변기 좀 깨끗이 써" 등의 구박을 한 귀로 흘리며 말로만 깔끔을 떠는 여자를 참아오고 있었나.

안방으로 가 잠자는 남편 얼굴을 들여다 봤다. 평소에 몰랐던 점이 왜 이리 많고, 대낮에도 안 보이던 흰머리는 언제 이렇게 늘었는지.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 배우자 얼굴의 주름을 보지 말라고 눈도 어두워지는 것인가? 참 고마운 조물주의 섭리다!

딸아이의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걸터앉아 비단처럼 곱고 반반한 줄만 알았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시작하려는지, 자잘한 여드름들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돋보기가 아니었으면 하나밖에 없는 딸애의 여드름도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이어 이불을 다 걷어차낸 아들 얼굴을 들여다봤다. 한참 전에 없어진 줄 알았던 솜털이 아직도 얼굴에 보송보송하다. 오동통한 두 뺨에 눈물 젖은 입맞춤을 해 본다. 언젠가, 눈이 어두워진 어머니가 싸 주신, 머리카락 든 도시락을 그리워하던 어떤 효자의 글을 읽으며 흘렸던, 똑같은 눈물이 아들의 두 뺨에 뚝뚝 떨어졌다.

*이 글은 이기란(48.사진)씨가 자신의 블로그(blog.joins.com/denicem2m)에 올린 것입니다.



"돋보기로 안 봐야 할 건 자기 얼굴"

댓글과 덧플

▶커피와 비=세월이 참 빠르지요. 어찌 잡을 수도 없고…

↘호주에서(이기란)=내겐 오지 않을 것 같던 게 빠지지 않고 찾아오네요. 노안이야 요즘은 수술할 수 있다던데, 그동안 가족이나 남에게 비친 부족한 나의 모습은 주워담을 수 없네요.

▶lmsruby=맘이 많이 착잡하셨겠네요. 저 역시 가끔 눈에 띄는 흰머리를 보고 놀라곤 해요.

↘호주에서=자연 섭리를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였어요. 옛날에 엄하던 시어머니들의 경우 자기 눈이 어두워지면 며느리 부족하다고 트집 잡을 일도 하나씩 줄었겠지요.

▶걍=저도 안경 쓰기 싫어서 그냥 그대로 지냅니다.

↘호주에서=돋보기를 쓰지 않고 보면 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사람관계도 그럴까요?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보지 않아도 좋은 것들까지 보여서. 저도 그냥 버텨볼랍니다.

▶학암=돋보기를 쓰고 보지 않아야 좋은 것은 자기 얼굴과 집사람 얼굴입니다. 돋보기를 쓰고 보면 실망이 크니까요. 돋보기를 쓰고 보아야 할 것은 손자.손녀 얼굴입니다. 돋보기를 쓰지 않고 보았을 때보다 훨씬 예쁘니까요.

↘호주에서=가족이란 보고도 못 본 듯 살아야 행복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