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가 왜 인기 끄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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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도(中道)' 전성시대다.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 구분 없이 중도 선호 발언이 잇따르고, 학계나 문화계에서는 '중도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자신의 이념 성향을 중도로 꼽는 이들이 느는 추세다.

홍윤기(동국대 철학) 교수의 중도 선언(본지 2월 14일자 22면)은 그가 진보학계의 대표적 논객이란 점에서 파장이 컸다. '강한 중도'를 표방한 홍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뉴라이트의 이론적 대부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의 미래 비전과 자신의 생각이 크게 차이가 없다고까지 언급했다.

이에 앞서 진보 쪽에선 소설가 황석영씨가 최근 한 인터뷰를 통해 중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에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주창했다. 보수 쪽에선 박세일 교수가 중도 지향을 표방했으며, 유력한 대권 주자들의 '자칭 중도' 발언이 이어졌다. 이처럼 급증하는 '중도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왜 지금 중도인가=지난해 초 뉴레프트를 표방하며 출범한 좋은정책포럼의 공동대표 임혁백(고려대 정치학) 교수는 중도 현상을 부동층의 확산으로 해석했다. 그는 "중도는 부동층의 유동적 중간지대이지 어떤 고유의 정파적 영역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진보나 보수 진영 모두 국가를 단독으로 이끌어갈 다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간지대의 사람들을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다 보니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오래전부터 중도 성향을 보여온 윤평중(한신대 철학) 교수 역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많은 이가 마땅히 지지할 정파를 찾지 못하고 회색지대에서 관망하는 모습이 중도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며 "범여권에서 그럴듯한 대선 후보가 나오면 현재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쪽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도 현상에 대한 기대와 우려=박세일 교수는 일단 "학계에서 중도를 지향하는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증가하는 현상이라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임혁백 교수도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갇히지 않은 개방적 사유의 자세가 중도라는 이름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적 시각도 나왔다.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진보의 새로운 생존술 차원에서 중도가 거론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보가 새로워지려면 뉴레프트를 해야지 왜 중도인가. 내용의 변화 없이 간판 형식만 바꾸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고 꼬집었다.

윤평중 교수 역시 "우리 사회가 점차 이념적 균형을 잡아간다는 긍정적 측면은 있지만 너도나도 중도를 외치니 다소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박세일 교수도 "말로만 중도를 떠들고 실제로는 시류에 영합하는 사이비 중도가 정치권에 많다"고 경계했다. "잘못된 정책을 계속 편들다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나는 중도'라고 말하는 것은 사이비"라는 얘기다. 그는 "중도를 말하기 전에 좌파와 우파 모두 자기 진영을 21세기형 진보와 보수로 개혁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홍윤기 교수는 본지 보도(2월 14일자 22면)를 통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강한 중도"라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강한'의 의미에 대해 "문제가 되는 사태에 대한 책임있는 투시력, 쌍방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 대안을 제시하는 해결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주변에 세계 4대 강국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회주의적 중도가 아닌 통합적이고 강한 중도 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내부의 분열은 강대국 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민족 및 사회 내부의 투쟁으로 공멸할 수 있다"고도 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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