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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은 끝났다”… 독립은 역사의 귀결/우크라이나 현지르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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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제적 비중 큰 「소련의 곡창」/독립후에도 영토 분쟁 소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소련이란 붉은 대제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독립주권국 우크라이나가 있을 뿐이다.
소련 제2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만난 사람들은 소련을 말할때 「스타리」(지나간,또는 낡은의 뜻)란 수식어를 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소비예트연방의 붕괴는 하나의 기정사실이었다.
『레닌과 함께 「스타리 하유즈」(구 연방)는 끝났어요. 완전한 독립국으로서가 아니면 우리는 신 연방에도 가담하지 않을 겁니다.』
키예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10월혁명광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광장에 우뚝 솟은 레닌상을 가리키며 우크라이나 독립은 당연한 역사의 귀결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의 뿌리임을 자부하고 있다. 17세기초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중엽 러시아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후부터 우크라이나 역사는 러시아인들에 의한 수난과 압제의 역사였다.
제1차세계대전과 함께 잠시 독립을 누리는듯 했지만 1917년 레닌에 의한 러시아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우크라이나는 다시 소련제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이로니컬한 얘기지만 레닌은 우리에게 불행과 행운을 다 가져다 주었어요.』
레닌상 철거작업을 위해 나와있던 한 시청직원은 『레닌동상이 소련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생각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레닌이 가져다 준 행운이 아니냐』라며 웃는다.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든 20여m 높이의 레닌석상 철거방법을 놓고 키예프시 당국은 고심끝에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우리는 머리를 잃는다』고 레닌이 말한바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 입장에서 치명적 타격이 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유럽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지정학적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경제적 비중이 실로 막대하기 때문이다.
인구면에서 러시아공화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5천2백만명으로 전체 소련 인구의 16%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비옥한 우크라이나 대평원에서 나는 밀은 「소련의 곡창」이란 별명을 듣고 있다.
소련전체 곡물생산량의 25%와 설탕의 53%,식용유의 33%가 우크라이나에서 난다.
공업생산도 마찬가지다. 도네츠크탄전에서 나는 석탄은 소련내 수요의 절대량을 충족하고 있고 철강의 35%도 이곳에서 생산된다. 소련 전체 공업생산의 20% 이상이 이곳에서 이뤄진다는게 우크라이나인들의 얘기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발트해 3국의 독립은 인정하면서도 우크라이나를 겨냥,『연방에서 이탈하는 공화국에 대해 러시아공화국은 국경재조정에 관한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심각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그의 이러한 발언을 쇼비니즘적·러시아 제국주의적 망언이라 규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운동단체인 「루흐」를 이끌고 있는 이반 드라츠 의장은 『그가 새로운 러시아의 「차르」가 되어가는 증거』라고 말하고 지난해 11월 그가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우크라이나공화국과 맺은 영토보전협정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 영토분쟁은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독립과 관련,반드시 해결돼야할 난제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은 러시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 타타르족이 모여살고 있는 크림반도지역은 원래 러시아영토였던 것을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에 떼붙인 지역이다.
우크라이나에 배치돼 있는 소련핵무기철거문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독립과 함께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정부의 입장이지만 신연방조약체결문제로 양측이 대립할 경우 순조로운 핵무기이양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는 오는 12월2일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국민투표는 단순한 요식절차로 독립을 기정사실이라는게 우크라이나인들의 얘기지만 그들로서는 독립이후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경제구조를 감안할 때 완전한 「홀로서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원유를 거의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소비재의 상당부분도 소련내 타지역에서 가져다 쓰고 있는 형편이다.
때문에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되 러시아등 구 소련내 공화국들과 유럽공동체(EC)스타일의 경제공동체결성을 추진한다는 게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공화국대통령의 복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키예프시내에서는 더이상 적기를 찾아볼 수 없다. 노랑·파랑으로 된 우크라이나 고유의 깃발이 곳곳에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5년전 체르노빌 대재난을 경험한 바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또다른 「정치적 체르노빌」을 원치 않고 있다.
『소련은 현재 불타고 있다. 이 불을 끄기 위해서는 볼가강(러시아)물도 필요하지만 드네프르강(우크라이나)물도,또 드네스트르강(몰다비아)물도 다 필요하다.』
이즈베스티야지가 오늘의 소련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경고다.<키예프=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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