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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돛대 높지만 바람도 거세다|격변의 소련 어제와 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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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이자 사회주의이론의 현실적 모델이었던 소련의 변화는 하나의 국가차원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기로 주목되고 있다.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소련의 변화, 나아가 세계의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질서를 전망하는 일이 필요해졌다.
소련사회, 더 넓게는 사회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미래상에 대한 전망을 다양한 시각에서 진단하기 위해 정치경제학자·철학자·정치사학자들을 초청,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이명현교수(서울대·철학) ▲박영호교수(한신대·정치경제학) ▲권희영교수(정신문화연구원·소련현대사)다. 【편집자주】
박영호=오늘의 소련사태를 근본적인 문제부터 얘기하자면 역시 l917년 혁명에서 시작해야겠죠.
우선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와 현실로 존재해온 사회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현실적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917년 혁명 자체가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혁명전 러시아는 가장 낙후한 유럽 변방국가였으며 절대왕조인 차르 체제하에 인구의 80% 이상이 농노와 다름없는 농민들이었죠. 더욱이 1차대전 발발후인 혁명전야의 궁핍과 불안은 극에 달했죠.
이같은 당시상황은 분명 혁명을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1917년 혁명은 분명 혁명이지만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건 반봉건·반의세 혁명이라고 봐야합니다. 그 결과 소련은 국가사회주의라는 방식으로 산업화·근대화를 이끌어온 것입니다.

<「진짜 사회주의」는 없어>
이명현=재미있는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봤을때 소련은 「진짜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는 얘기군요.
저도 최근 소련을 방문해 마르크시즘전공 역사학자와 인터뷰 했을때 비슷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는 소련의 70년 역사중 하룻밤도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마르크스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선진자본주의국가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마르크시즘을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입니다.
마르크시즘을 단순히 초기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 본다면 문제는 간단하죠. 하지만 마르크시즘을 필연적 역사발전법칙으로 보고, 이에 충실히 접근하면 오늘의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니다』고 말할수 있을 겁니다.
저는 마르크시즘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문제의 근원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없어져버리는 이상사회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가 『미래의 이상인 공산주의경제가 이러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결국 오늘의 소련경제, 즉 레닌과 스탈린이 『이것이 공산주의』라며 만든 사회가 곧 현실 사회주의라는 것이죠.
권희영=어떤 사회주의국가도 엄격한 마르크시즘적 의미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아니라는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르크시즘이론의 위기가 아니라 현실사회주의의 의기입니다. 마르크시즘의 사회주의 이론과 동떨어져 존재해온 사회주의국가의 현실을 짚어봐야겠습니다.
박=일단 오늘날 소련의 붕괴가 마르크시즘적 의미의사회주의가 아니면서 경직된 마르크시즘을 적용해온 오류예서 비롯됐다는 점은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그 결과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사회가 사회주의보다 월등히 앞선 발전을 이루게 된것이죠. 예컨대 2차대전후 나둬졌던 동·서독중 자유진영의 서독이 사회주의 동독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앞섰지 않았습니까. 사회 전체적부의 증대에 따라 오히려 서독이 「다같이 잘 살아보자」는 사회주의적 이상에 더 가까워진 셈이죠. 그러니 동독에서 사회주의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질 수밖에요.
이=직접 만나본 소련사람들의 생각은 간단하더군요. 한마디로 「속았다」는 것이죠.
두가지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인데, 하나는 『자본주의는 곧 망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가 더 잘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는『우리는 가난할뿐만 아니라 모욕당해왔다』고 까지 말하더군요. 현실사회에서 작동하지않는 사회주의 이론연구를 강요당해왔다는 것입니다.
권=그렇다고 혁명이후 70여년의 소련역사를 완전한 실패로 단순 평가할수는 없죠.
혁명직전 러시아의 어려운 상황은 앞서 언급된바와 같이 심각했죠. 이때 볼셰비키의 승리는 막연하지만 다수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오랜 내전에서 볼셰비키적군이 반혁명세력인 백군에 승리한 사실입니다.
민주주의가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도 중요한 러시아적 특수배경이죠. 당시 낙후된 러시아사회에서 전제권력에 도전해 개혁을 요구할 다수세력은 전무했습니다. 단지 한줌에 불과한소수 인델리겐차만이 러시아사회를 비판하고 저항했죠.

<마르크시즘에도 오류>
결국 혁명을 성공시킨 소수가 택한 것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점진적 개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보한 소수독재의 급진적 사회재편이었죠. 소련사회를 이끈 소수가 일반민중의 요구를 일정선에서 스스로 수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집착한 사회주의 이론이 현실에 잘 맞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마르크시즘의 철학적 배경에 중요한 오류가 있음도 지적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과신한 계몽주의의 오류입니다. 마르크스는 계몽주의자였습니다. 인간의 두가지 능력을 과신했죠.
첫번째는 인식능력입니다. 즉 인간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알수 있다고 믿은 거죠. 두번째는 실천능력인데, 인간이면 누구나 착한 본성이있어 도덕적 가치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이란 믿음입니다.
물론 두가지 모두 인간을 잘못 본 것입니다.
권=지금까지 얘기된 원초적 한계의 결과 생산력부진이라는 모순이 쌓일대로 쌓여 개혁의 원동력으로 폭발한거죠.
소련에서 한인들이 가장근면하고 잘 살죠. 그들은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별도로 계약, 그만큼 더 일하기 때문이죠. 땅을 빌려 일하면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는 것보다 3∼4배를 더 수확합니다. 임대료를 내고도 훨씬 많은 이득을 남기죠.
이=통상 개인경작지 5%가 집단경작지 95%보다 더많은 수확을 거둔다고 하더군요.
권=그렇습니다. 그러니 집단농장의 해체없이 식량문제를 해결할수 있겠습니까. 한창 수확기에도 소련농민들은 하루평균 2시간씩밖에 일하지 않슴니다. 그러니 『올가을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가서 수확을 하지않으면 많은 사람이 굶을 수밖에 없을것』이라고 걱정하는 개혁파들이 많아요.
이=경제만 아니라 정치적억압도 쌓일만큼 쌓여왔죠. 묽은 광장에 레닌의 묘를 만들어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참배토록 강요해 왔습니다. 광장주변의 7개 대형 고딕건물 꼭대기마다 붉은 별이 달려 있더군요. 모두 스탈린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종교적 우상」과 같아요.

<혼란계속땐 장래불투명>
그런 사회에서 지식인들이『질식할 것같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당연하죠.
박=바로 그같은 질식할 상황이 결국 고르바츠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불가피하게 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숨통이 터지자 마구 분출한 거죠.
그러나 앞길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죠. 개혁이 제대로 안될 경우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요. 특히 적게 일하고 편하게 사는데 익숙해진 농민들은 여전히 사회주의에 안존하려고 합니다. 이들이 곧 보수파의 배경이죠. 혼란이 계속될 경우 소련의 장래는 불투명해지겠죠.
권=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쿠데타 실패후 시장경제로의 개방이라는 방향은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과정상의 어려움이죠.
혼란과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경제가 시작될 경우 실업과 파산은 이어질것입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생산력향상을 자극하는 유일한 길이에요.
고르바츠프가 망실인 것은 이같은 위험부담때문이죠. 옐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하겠다』는 식이죠. 오히려 소련내에서는 옐친보다 더욱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아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위험부담을 덜어줄수 있는 서방의 원조입니다. 국제질서의 안정이라는 면에서 소련을 원조해주는 것이 오히려 서방세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박=저는 좀더 비관적입니다. 경제적 구조를 완전히 뒤엎어야하는 개혁이 쉬울수는 없습니다.
60년대말부터 이미 시장경제실험을 계속해온 유고도 아직 제자리를 못잡고 있지않습니까. 자본이 형성되고 가격구조가 자리잡기까지 걸릴 시간은 예측하기 힘들며, 어쩌면 실패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권=저는 한세대, 약 30년정도가 필요하리라 예상합니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개인에게 스며들기까지의 시간이죠. 개혁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해야할 필연적 방향선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역사적 필연의 수순이라는데 동감합니다. 그러면 사회주의의 기능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권=이후 사회주의의 역할은 자본주의에 대한 보완기능일 것입니다.
사회주의적 보완기능이란 곧 사회적 연대의 강조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연대감을 해치는 지나친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능이죠. 구체적 정책은 곧 사회보장·복지형태의 것들이 될 것입니다.
이=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인간의 몸에 비유해보고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자유」이념은 교감신경계, 사회주의의 「평등」이념은 부교감신경계라고 생각됩니다. 교감신경은 활동을 자극하는 양의 기능이고 부교감신경은 지나친 활동을 억제하는 음의 기능이죠.

<북방정책 긴 안목으로>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역시 대립적 이데올로기로 보기보다 조화될수 있는 동양식 음양개념으로 봐야한다는 거죠.
박=뭐니뭐니 해도 중요한 것은 우리 문제죠. 북방정책말입니다.
이=지금까지 너무 한건주의에 치우쳐 장기적 비전이없었어요. 심지어 국내정치와 연계해 권력경쟁수단으로 이용되는 듯한 느낌까지 들어요. 대북정책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박=그점에서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것어 정보부족입니다.
앞으로 소련사회는 상당기간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 전망되는데 이런 혼란기에 우왕좌왕해서는 안되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불쑥 30억달러를 내놓는 것은 만용입니다. 혁명이후 러시아 차르체제에 빌려줬던 서방의 돈이 하나도 변제되지 않았던 경험을 되새겨야 합니다..
권=북방정책의 최종 목표는 통일 아닙니까. 따라서 소련과의 관계강화도 실은 북한 개방을 위한 우회전략으로 볼수 있죠.
하지만 이제는 동북아, 특히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퇴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북방정책의 목표는 수정돼야죠. 남북관계나 국제정치적 효과보다 내실있는 경제실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참석자
이명현<서울대교수·철학>
박영호<한신대교수·정치경제학>
권희영<정신문화연구원교수·소련현대사>
◆장소:본사회의실 ◆정리: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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