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핵폐기 보장 없는 합의는 눈가림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베이징에서 진행 중인 6자회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이중적이다.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두 번째인 이번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명시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단계 조치들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반길 일이다. 하지만 협상 결과가 13년 전 '제네바 기본합의'의 재판(再版)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없지 않다.

첫날부터 의장국인 중국은 합의문 초안을 참가국들에 회람시키는 등 이번 회담은 어느 때보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다. 합의문 서명 후 10주 내 북한이 5MWe급 흑연감속로 등 영변 핵시설들의 가동을 중단 또는 폐쇄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면 5개국은 북한에 대체에너지를 제공한다는 것이 골자다. 또 동북아 안보협력, 북.미 관계 정상화, 북.일 관계 정상화 등 5개 실무 협상그룹을 구성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9.19 공동성명이 1년5개월 만에 처음으로 '행동 대 행동'의 구체적 이행 단계에 들어선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실패로 끝난 제네바 기본합의는 북한 핵문제를 미래 핵의 동결과 과거 핵의 규명.폐기라는 두 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단계마다 중유와 경수로로 보상해 주는 구조로 돼 있었다. 이번 합의는 폐기를 전제로 동결에 대해 보상하는 '포괄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제네바 기본합의와 다르다는 것이 미국 측 설명이다. 하지만 기존 핵물질과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에 대한 북한 측 의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맹점이 아닐 수 없다.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단계 조치가 어떻게 핵 폐기라는 마지막 단계와 빈틈없이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다. 가시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채찍은 멀리한 채 당근만 제공하는 협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되 아무 실속 없이 우리 측만 부담을 떠안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