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 자세로 사회 배웁니다"|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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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공의 마지막 육참총장으로 88년 6월11일 자신의 전역 사에서 그 당시 불편했던 군의 입장을 함축적으로 대변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은바 있는 박희도 예비역 대장(57·육사1기)은 군복을 벗고 난 이후 3년2개월 동안 거의 백지상태에서 인생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고 있다.
육사동기생인 박세직·박준병씨 등과 함께「3박」으로 불리기도 했던 박 전 총장은 전역 이듬해인 89년 미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1년간 연구원생활을 보냈다.
작년 8월에는 또 서울 강남에 효암 연구소(청담동124의5 죽암 빌딩 702호)라는 자신의 개인사무실을 열고 그동안 소원했던 옛 동료들이나 친지들과 만나 정담을 나누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효암」은 그가 3군사령관으로 있을 때인 84년 일붕 서경보 스님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무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4일 오후 30여 평 남짓한 그의 연구소에서 기자와 만난 박 소장은 검게 탄 얼굴에 무척 건강한 모습이었다.
퇴역이후 자신의 바쁜 일정을『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더라』는 말로 대신한 그는 『1주일에 2∼3일 정도는 북한산을 비롯, 서울근교에 있는 산을 찾아 등산을 즐긴다』고 했다.
88년 전역할 때까지 줄곧 친 전두환 계열로 분류되기도 했던 박 장군은 또「일 정이 맞는 범위 내에서」전전대통령과의 등산에도 가끔 동행한다고 설명했다.
박 장군은 그러나『가끔 등산을 통해 서로 환담을 나누는 것 외에 특별히 연희동 자택으로 전전대통령을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항간에 나돌고 있는 빈번한 접촉설을 우회적으로 부인하기도 했다.
『총장으로 있을 때인 87년 김대중씨에 관한 발언으로 내가 마치 뿔이 서너 개쯤 달려 있는 사람으로 비춰진 것 같습니다.』
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제1공수여단장으로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투입,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을 지휘하기도 했던 박 장군은 그동안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왜곡돼 온 것 같다고도 말했다.
전역이후 재경 창령 향우회장과 이방국민학교(창령군)동창회장,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25 기 회장직 등 4∼5개의 감투를 쓰고 있는 박 전 총장은 최근 들어 차츰 정치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박씨는 그러나『내가 과연 정치에 걸맞은 사람인지를 신중히 검토해 보고 있는 정도』라며 자신의 정계진출 설을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참모총장 재직 시 언론에 투영된 전형적인 강성 야전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소탈하고 격식을 싫어하는 그는『나도 군복을 벗고 사회의 일원이 됐으니 만큼 사회초년병으로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최근 앨빈 토플러가 미래사회를 예측해서 쓴『권력의 이동』이란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박 소장은『머지않아 우리사회도 지식과 정보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며 저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제26대 육참 총장으로 부임하자마자「한국적인 군인 상 정립」과「2000년대를 향한 동적인 육군 건설」등에 주력하기도 했던 박 전 총장은 또 69년 맹호1연대 재구 대대장 시절 월남전에서 겪었던 경험과 에피소드 등을 2백자 원고지 약 4백장 가량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친지로부터 받았다는 한 스님의 법회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실로 광대무변한 불교의 진리를 새삼 깨우치고 있다는 박 장군은『백 문이 불 여 일견이고 백 견이 불여 일행이며 백 행이 불 여 일각이라는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고도 말했다.
현역으로 있을 당시 전역하는 후배들에게 늘 강조한 것 중 하나가 바로「지족불욕」(만족한 줄 알면 스스로 욕되지 않는다)이었다고 말하는 박 장군은 자신도 역시 이를 실천하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특전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특수 전 분야의 맹장으로 알려진 박 장군은 또『우리 군도 이제는 통일 이후 전개될 새로운 안보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때가 됐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박 장군은 또『8·18 도끼만행사건 당시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이 우리에게 비무장으로 현장에 들어가 최 외곽경비를 맡으라고 명령하는 컷을 보고 약소민족의 비애를 실감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 장군은 그러나 우리 군이「미국의 장군과 독일의 병사, 그리고 일본의 하사관」으로 수준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군 내부의 결속과 단결』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실제(신장 1m70cm)보다 훨씬 아담해 보이는 박 소장은 준장 때인 76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 만 5년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할 만큼 강한 집념을 과시하기도 했다.
부인 석홍련 여사(52)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는 박 전 총장은 서울 양재동 자택에서 두 자녀(29, 26세)와 함께 모처럼 오붓한 혈육의 정을 만끽하며 지내고 있다. 차남(22)은 현재 미국 남가 주 대학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있다.
『비록 군에서는 대장으로 예편했지만 이제는 이등병의 자세로 사회생활에 임하고 있다』는 그에게서 한 퇴역장군의 뼈를 깎는「위대한 자기변신」을 보는 것 같았다.<김준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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