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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 다큐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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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tvN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홈페이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이하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이 논란의 '핵'. 페이크 다큐 기법은 없던 사건이나 일을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영화 '블레어 위치'나 미국의 현장고발 프로그램 '치터스(Cheaters)'처럼 현실과 가상을 혼동시켜 관심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재연임을 나타내는 장치가 부족하고 자극적 요소가 강해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재연을 실제장면처럼 연출= 케이블 채널 tvN의 새 프로그램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지난달 29일과 지난 6일 방송분에서 한 여성이 제작진과 함께 배우자의 불륜현장을 급습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모자이크 처리가 된 남녀배우는 거칠게 항의하며 욕설을 쏟아냈고 이는 모두 '삐' 소리로 처리됐다. 프로그램 말미에 '일부 내용에 실제 사연을 담았다'는 자막이 보여질 뿐 등장인물들이 재연 배우라는 점은 드러나지 않아 실제 상황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한 코너인 '몰래카메라'는 지난달 27일 연예인들이 고급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을 방송하면서 접대부를 연상케 하는 여배우들이 출연해 실제 상황처럼 묘사됐지만 이 역시 '설정'이었다.

지난해 10월 케이블 음악 엔터테인먼트채널 M.net이 기획한 'SS501의 SOS'는 재연을 실제장면처럼 연출한 부분이 문제가 돼 방송위로부터 경고조치(38조 제1.2항)를 받기도 했다.

최근 한 전자회사가 낸시랭과 공동으로 기획전을 벌이며 ''낸시랭, 실종 수사대 모집ㆍ사진''이라는 페이크 다큐 이벤트를 개최했다. 그러나 네티즌은 이를 실제상황으로 오인, "낸시랭이 정말 실종됐냐"며 포털 사이트 게시판 등에 그의 안위를 묻는 글들을 수차례 올렸다.

◇"낚시질의 멀티미디어 버전"= 페이크 다큐에 대해 시청자와 네티즌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각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충격적인 내용에 긴장했는데 모든 것이 연기였다니 당황스럽다" "판단력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방송" "일종의 낚시질의 멀티미디어 버전이다" "심각한 유언비어가 되거나 사실의 비뚤어진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라고 밝힌 네티즌 'rkd826'은 지난해 11월 'SS501의 SOS'를 본 후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프로그램 2회를 봤는데 너무 무섭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정신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든다. 자꾸 생각이 나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건전한 관계형성 방해=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페이크 다큐에 대해 전문가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고 건전한 관계형성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한다.

강릉아산병원 백상빈 교수(신경정신과)는 "페이크 다큐로 제작됐다고 하더라도 재연임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수 있다"며 "사회 틀 안에서 형성되는 자아의 정체성은 한번 속으면 다음부터 속지 않으려는 속성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의심이 생활화된다"고 말했다. 연세대학교 황상민 교수(발달심리학)도 "페이크 다큐에 따라 만들어진 가짜 현실에 기존의 좋지 않았던 경험이 더해지면 타인에 대한 낙인과 부정적 인식이 만들어진다"며 "과도한 선입관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건전한 관계형성이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제동 걸 수 있는 장치 부족 = 전문가들은 페이크 다큐 기법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방송모니터링팀 김언경 부장은 "재연기법 심의규정 상 '자료사진' '재연' 등의 표기를 몇 초 이상 해야 한다는 상세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방송위원회의 박장원 선임조사관은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들이 거의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재연임을 나타내며 규정을 지켰다고 주장한다"며 "일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책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tvN의 홍보팀 김종은 대리는 "다음 주 방송부터 '본 프로그램은 실제 존재했던 사랑과 배신을 소재로 제작진이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라는 자막을 5초 가량 내보낼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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