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당위성 성서차원서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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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함석헌은 1901년 태생이기 때문에 스스로 20세기 사람이라고 자처했다. 그는 16세에 관립 평양고보에 입학할 때까지 한문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사립소학교를 거쳐 평북용천군의 시골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1만세운동에 가담, 어렵게 들어간 평양고보를 쫓겨난 후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 들어가 2년만에 졸업했다. 그후 일본 도기오고사에 입학하면서부터 우리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고사 졸업후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10년동안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두 차례 투옥됐다. 교사시절 일본인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아 김교신등과 「무교회」를 표방,『성서 조선』이란 얇은 잡지를 냈다. 그 잡지에 그의 젊은 시절의 글들이 대부분 실려 있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그 잡지에 실렸던 글이다.
일제에 의해 오산학교마저 좇겨난 그는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았다. 조만식등이 중심이 된 자치정부 평북 문교부장으로 추대됐으나 신의주 학생궐기사건의 책임을 물어 소련군이 두 차례나 감옥으로 보내자 어쩔수 없어 월남했다.
남쪽에 와서도 필학사건으로 경찰에 구금됐으며 유신체제 이후엔 연금·구속을 여러차례 당했고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도 받았다.
그는 인권·민주학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한길사에서 간행한 그의 전집 2O권은 바로 그의 투쟁사의 결실이다. 그는 불행히도 암에 걸려 긴 투병끝에 89년 타계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1932년부터 1933년 사이 『성서 조선』에 연재했던 글을 해방후 보완하여 펴낸 것이 보완된 책에는 6·25까지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역사선생으로서 교과서로 사용할 마땅한 책이 없어 스스로 집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조선 역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5천년 찬란한 역사···」식이거나 아니면 일제의 압력에 따라 무능한 민족의 역사로 일관한 책들이어서 양쪽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가르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일제의 감시 밑에서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는 어려움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서사적 표현과 상징적 언어를 선택했다.
그는 역사가로 연대사적서술을 목적하지 않고 그 해석자로서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의 교본이 아니라 사상서다. 그는 과거를 해석했으나 내면으로는 바로 고난의 현장인 그시대의 민족적 수난을 울면서 썼던 것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이 민족이 왜 이렇게 수난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 그것은 패배주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허구적 국수주의에 대한 배격이었다.
그는 연대기적 서술, 왕권중심의 역사관이나 계급적사관을 거부하고 「뜻으로 본 사관」을 내세웠다. 그 뜻을후기에 확대시켰는데 그 기저는 처음 「성서적 입장」이라고 했듯이 성서의 사관을 말한다. 그러나 성서 전반이 아니고 그중에도 「수난의 종」의 사상으로 유명한 이사야 53장에 담긴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에 대한항변에의 한 대답이다.
수난을 문제로 제기했기에 그는 객관적 조건들을 대충 열거했는데 그 중요한 것은 지리적 조건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수난의 장이 될 소지가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를 현재의 땅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만주당까지 포괄하므로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제것을 되찾자는 정열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그는 고구려를 이 나라 역사의 맏아들로 본다. 까닭은 바로 그때 만주와 한반도를 아울러 무대로 삼았고 그러므로 장엄한 미래가 약속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그 맏아들이 요절했다. 그후 몇차례 제것 찾을 기회가 주어졌으나 거듭 실패한 까닭을 밝히려고 결론에서 시도한다.
고구려가 쓰러지면서 실패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을 만회할 힘이 왕권을 중심한 지배층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대 왕권 중심의 역사를 계속되는 위축의 역사, 부패의 역사로 맹렬히 비판한다.
신라통일 이후의 역사는 모두 위축된 상태에서 안주하려는 역사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는 왕조사에서 역적으로 몰린 인물들이 주도하는 민중의 기백에서 본래의 한국혼을 본다.
이와 관련, 그가 주목한것은 단속적으로 일어난 북벌 운동이다. 북벌 운동이란 다름아닌 본래의 자리를 되찾자는 정신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번번이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실패한다.
그가 한국민의 성격을 평화적이라고 보고 스스로 평화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북벌운동을 지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시각은 모두 자주적 민족으로서 남을 침범하지도 않고 예속되지도 않는 민족으로 살아야 한다는 염원의 발로다.
그는 역대의 종교에서도 새로운 기운을 기대했다. 불교·유교, 그리고 기독교에서! 그러나 언제나 실망한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저들의 사대주의요, 또 하나는 저들이 언제나 민중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왕조 역사상의 역도들이 민중과 더불어 민족혼을 되살리려 일어섰다가도 뒤에 가면 그 민중을 배반하는데 그것을 그들이 패배하게 되는 한 원인으로 보는 입장과 같다.
그는 「실패한 역사」를 말하고, 다하지 못한 책임을 민중에게 물으면서도 그 책임을 민족성에 돌리지 않고 수수께끼로 여운을 남기는 서술법을 지속하다가 마침내 고난사의 수수께끼를 「종교적 차원」에서 풀이한다.
한국민족이 오랫동안 중국대륙의 세력들에 유린되어왔고 그들의 문화권에 푹 젖어들었으며, 지배층은 언제나 사대주의의 표본이었으면서도 한국민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는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서 담당할 과제가 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그게 무엇인가. 이 물음에 그는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으로 대답한다.
볼품도 없고 끝없는 수모에도 저항할 힘이 없는 자신을 처음에는 멸시했고 과거에 저지른 죄값이려니 했는데, 다시 보니 그것은 인류가 맞을 매를 대신 맞고 인류가 당할 모욕과 수난을 대신 당하는 것으로 세계사적 사명을 하도록 선택되었다는 풀이다.
6·25동란으로 한국이 세계의 무덤이 된 것도 그 상징으로 보면서 그는 우리 민족을 세계의 거리에 선 젊은 창기에 비긴다.
이런 결론은 얼른 보면 패배주의 같다. 그러나 실은 세계를 향해 저항의 절규를 내뱉는 것이다. 힘없는 젊은여인을 처참하게 유린하고도 여전히 신사로 자처하면서 젊은 창기를 비웃는 저들(제국주의자들)을 고발하는 절규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일제하 30년대에 『성서조선』에 발표했던 글을 해방후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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