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야화|3·운동 그후/만세에 불출한 동네들 수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김윤식이나 그밖의 명망 높은 귀족들은 당초 이 운동이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여기에 가담하기를 꺼렸다. 이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까지도 이 운동이 이렇게 커질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민중들의 호응이 없음은 물론 그들로부터 외면당해 33인들만 투옥되고말것으로 알았는데 뜻밖에도 민중들의 반응이 열화같아 만세대열에 끼지 않으면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부끄럽게 생각한 나머지 방방곡곡에서 앞 다퉈 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선 것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민중들이 몽매해서 독립이 뭔지도 모르고 일본놈한테『죽여줍쇼』하고 끌려만 다닐줄 알았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일반 백성들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가장 예민하고 현명한 사람들이다.
명망높은 상류층에서는 백성을 우습게 본 나머지 임금님만 모시면 됐지 그까짓 백성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있다.
이미 동학혁명에서 백성들의 힘을 보아 왔을 터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백성들이야말로 애국심에 불타고 있는 순수한 애국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같지만 나라 일을 깊이 생각하고 어떤 길이 나라를 올바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알고 있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고 지위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상류층이란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영달과 파벌의 득세, 그리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하여 나라가 어떻게되든 그런 것은 염두에도 두지않는 사람들이었다.
조선조 5백년이 이때문에 당파싸움으로 일관되어 국력이 쇠약해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었다.
고종때에 이르러서는 이 버릇이 더욱 심해져서 결국 나라가 파멸하는 위기에 빠졌고 백성들이 일어나서 동학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외국군대의 힘으로 세력이 잠시 꺾였지만 민중들의 구국정신은 면면히 흘러서 3·1독립만세로 또다시 터졌다고 생각된다.
3·1독립운동이 보여 준 또하나의 교훈은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친일행동을
그후부터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이 호의호식하며 버젓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이들의 친일행각이 크게 지탄받을 일이 아닌 것처렴 여기는 등 한때 민족의 정기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3·1운동은 이렇게 마비되다시피했던 민족정기를 일깨워주었다.
서울에서는 각 동네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만세대열에 참여했고 여기에 불참한 동네는 부끄러워 머리를 못들고 다닐 지경이었다.
이와 동시에 경찰은 물론 총독부 관리로 있던 조선사람들 상당수가 현직에서 스스로 사퇴하기도 했다.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던 조선인 점원들의 사직도 꼬리를 물었다.
이완용이나 송범준같은 매국노의 집에는 돌팔매가 날아들었고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집에는 행인들의 욕설이 빗발치듯 했다.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은 것도 천도교에 출입하는 조선인 형사가 민족정기를 발휘해서 그 사실을 알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완연히 느낄수 있었던 것은 독립만세 이후로 우리네들의 생활과 생각이 뭔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무슨 잘못이 있어도 『우리들끼리인데 뭐가 어떠냐』며 서로 아끼고 양보하는등 동포간의 친화력이 부쩍 강해진 것이다. 우리외적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단결하고 서로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도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연마해서 일본을 능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 결과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고, 도처에 학교·강습회 등이 생겨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향학열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수해가 나면 수해구제 의연금이 답지해 오고, 조선교육회가 설립되어 빈곤한 학생을 돕는 운동이 일어나는 등 신생활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