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후계논란 다시 잠복 확실/노 대통령의 「논의중지」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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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총선」 입장 분명하게 표명/불만 민주계 공세 자제 예상
노태우 대통령이 5일 대권후계자 선정문제를 둘러싼 민자당내 갈등에 유감을 표시한 내용이 예상을 넘는 강도와 의미를 담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여름휴가를 끝낸 노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향후 정치일정이 법과 당헌에 명시돼 있으므로 왈가왈부할 소지가 없다』며 『나는 이에 따른 정치일정을 이행할 것이며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정치일정의 주도적 관리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노대통령의 이 발언은 김영삼 대표가 제주휴가중 자유경선을 앞세워 제기한 총선전 조기 후계자 결정구상에 대한 분명한 거부표시로 받아들여져 민자당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당내분의 도화선으로 지목된 「야당식 경선」 발언을 한 최영철 정치특보에 대한 심한 질책도 있었으나 노대통령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김대표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노대통령이 이날 회의에서 피력한 다음과 같은 여러 대목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는 느낌이다. 『무엇이 답답해 정치일정 문제를 논의하고 국민을 불안케 하느냐. 반성해야 할 일이다』『지금은 정치일정의 선후를 갖고 다툴때가 아니다』….
노대통령은 매우 노한 표정으로 이같은 말을 했으며 『정치지도자들의 사치성 휴가를 국민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알아야할 것』이라고 휴가행태에 대한 문제제기도 곁들여졌다는 후문이다.
노대통령은 이어 『법과 당헌에 따르는게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각자 편한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해 김대표가 제시한 정치일정을 「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듯 했다.
민자당내 정치일정 논란의 핵심인 차기 대통령후보자의 선출과 14대 국회의원총선중 어느 것을 먼저 실시할 것인가에 대해 이날 노대통령은 명시적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여러가지 각도에서 해석해 보면 「선총선」임을 분명히 시사한다는 것이 대체적 분석이다.
노대통령이 말하는 민자당 당헌에는 대통령후보의 선출시기를 「현대통령 임기만료 1년전부터 90일전까지」로 못박아 내년 2월24일부터 가능하도록 돼 있다. 이는 김대표 요구의 핵심인 「금년내 후계자 선정」이 당헌과 맞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에다 후보자를 전당대회에서 뽑아야 된다는 2중장치가 돼있는데 2년마다 열리는 정기전당대회는 내년 5월9일이다.
총선시기는 법(국회의원선거법)에 금년 12월30일부터 내년 5월8일까지로 돼있어 정기전당대회는 총선후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후보자 선출을 위한 준비기간(공고일 1개월)등을 따져보면 노대통령이 생각하는 정치일정은 「내년 2∼3월 총선,5월 후보자선출 전당대회」인 것 같다. 원래 이 일정이 청와대와 민정계가 예정한 일정이다.
노대통령이 워싱턴 포스트지 회견에서 내년 2월 후계자 가시화를 비춰 민주계에선 2월 전당대회,4월 총선안도 검토했었는데 이를 다시 원안대로 되돌린 셈이다.
노대통령은 이와 함께 자신의 지난 7월11일 정치일정 논의중지 지시를 환기하고 『정치일정 논의 유보지시를 했음에도 국민과 동떨어진 소리를 하면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정치일정 논란의 재연가능성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
노대통령의 이같은 지적에 민주계측은 내부적으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대표의 측근인 김덕룡 의원은 『정치일정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국이 안정될 수 없음이 증명되고 있다』며 『공개적인 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두분(노대통령과 김대표)이 조용한 가운데 협의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내부논의의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측근의원은 김대표가 『총선후 후계자 결정은 나를 후계자에서 배척하려는 의도』라고 반발해 왔음을 환기,『노대통령의 발언은 김대표에게 백기를 들라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했다.
노대통령이 전달하려는 뜻은 김대표에게 후계자 접근태도에 있어 「민자당의 2인자로서의 위상을 고수하라」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어 김대표측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실제 노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김대표의 소위 「휴가정치」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토로했다는 것이며 참석자들은 『당문제에 관해 이처럼 역정을 낸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는 반응이다.
민정계의 핵심 중진의원은 노대통령이 자신에 대해 김대표측이 「2중플레이」 운운하며 신뢰성 문제까지 걸고 나온데 대해 특히 불쾌감을 가진 것으로 전했는데 『노대통령은 이날 발언으로 김대표측에 분명히 응답한 것』이라고 노대통령의 심기를 해석했다.
민주계는 그러나 당장 불만을 표출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대통령이 김대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대국민 독자선언의 발상을 제기했던 황병태 의원은 『노대통령의 발언은 최특보에 대한 질책에 비중이 있다』며 『총선전 후계자선정을 명시적으로 배제한 것이 아니며 노대통령이 후계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다.
민주계의 강공자세가 수그러든 것은 제주 휴가정치가 대권욕과 연결될 분위기가 있는데다 「시간이 흐르면 후계자는 김대표뿐이다」는 소위 「대세론」이 위축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9일 오후로 예정된 노대통령과 김대표간의 청와대회동은 의견대립양상이 될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김대표는 우선 노대통령과의 관계호전에 비중을 둘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시각차가 확실히 노출돼 있고 노대통령이 지시한 정치일정 논의중지 시한인 「정기국회말인 올 12월」에 대해 김대표측은 노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시기인 「9월말」로 잡고있어 언제라도 대치상태로 돌변할 수 있다.
노대통령의 이번 지시로 그동안 돌출된 당내갈등은 잠복기에 들어갈 것이나 그것은 「한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관측이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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