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공부] "목마르면 물 먹듯이 아이들, 책 집어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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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씨(왼쪽에서 둘째) 가족이 함께 책을 읽으면서 피터팬과 마법의 별의 주인공 흉내를 내는 아들 준걸이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김형수 기자]

"집에서 TV를 치우고 나자 아이들이 목마르면 물을 먹듯이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잡더군요."(엄마)

"처음엔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엄마.아빠와 거실에 둘러앉아 책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치영.12)

"심심해서 책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집에만 들어오면 두세 시간씩 쉬지 않고 책만 읽을 때도 많아요."(준걸.9)

경기도 평택의 치영이네는 '독서 가족'으로 동네에서 유명하다. 엄마 김정희(38)씨가 가족을 설득해 3년여 전에 집에서 TV를 없앤 뒤 얻은 소득이다. 딸 치영(초등 5학년)이와 아들 준걸(초등 2학년)이는 학교에 제출한 가족 신문에 '우리 집은 TV가 없는 집'이라고 소개해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TV가 있던 자리에 책장과 앉은뱅이 책상이 놓이면서 거실은 자연스럽게 온 가족이 모여 책을 읽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김씨는 "남들은 논술 교육에 대비하려는 극성 엄마로 날 바라보기도 하지만 TV를 없앤 것은 교육보다는 가족이 어울려 이야기하며 함께 뒹구는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였다"며 "책을 통한 교육의 효과는 덤으로 얻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 1년여 시행착오 끝에 TV를 없애다=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평면TV를 장만할 정도로 치영이네는 흔히 얘기하는 'TV족'이었다. 영화광인 김씨는 TV 앞에 앉아 '비디오 여행'을 하기 일쑤였고 스포츠광에 경제뉴스 매니어인 남편 이인석(45)씨 또한 TV를 끼고 살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이 TV에 '초연'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것은 TV이고,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의 감성은 메말라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가정을 삼켜버리는 '악당'을 추방하기로 결심했죠."

첫 관문은 남편이었다. TV의 폐해를 고발하는 내용을 다룬 책을 들이대며 남편을 설득했다. 교육 서적의 중요 대목에 밑줄 쳐가며 남편이 읽어주길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두어 달, 마침내 남편이 움직였다. 2002년 가을 무렵 TV를 거실에서 안방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국제 경기가 있는 날 뒤에는 '말짱 도루묵'이 되기 일쑤였다. TV는 다시 베란다로 옮겨졌고, 그래도 여의치 않자 '안 보이면 덜 볼까'싶어 TV에 장식장까지 만들어 씌웠다. 그 과정에서 '부부싸움'도 적잖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고 아이들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들이 손에 책을 잡기 시작했고,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번엔 남편이 먼저 제안하더군요. 변화를 체험한 우리 부부는 흔들리지 않고 TV를 베란다 창고로 넣어버렸어요." 그때가 2003년 10월, TV를 완전히 없애는 데 1년이 걸린 셈이었다.

◆아이들이 책을 손에 잡다 ="TV를 없앤 뒤 아이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갖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책을 읽는 엄마의 모습을 많이 지켜본 게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에요."

김씨는 거실의 TV가 있던 자리에 책장을 놓고 아이들이 아무 때나 손쉽게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책장 앞에서 엄마.아빠가 솔선해 책과 신문을 읽었고 아이들도 자기 방보다는 거실에서 책읽기를 좋아했다. 김씨의 '아이들 책읽기 뒷바라지'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책읽기는 연령대보다 낮은 수준의 책으로 시작했어요. 특히 책 읽기 환경에 늦게 입문한 큰아이에게는 한두 살 아래 연령대의 책을 권해 흥미를 유지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죠."

어떤 책을 골라줄지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그림 위주의 창작동화와 간단한 원리의 과학동화, 기본적인 전래동화와 명작 위주로 정했다. 이때는 엄마가 거의 책을 읽어주는 시기였기 때문에 엄마의 주관으로 책을 선택했다.

물론 지금은 책 선택에 아이들의 의사를 가장 우선한다.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아이들의 관심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요. 시기별로 보면 공룡.동물.곤충.역사. 인물 순으로 바뀐 것 같아요. 아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을 보이면 그와 연계된 책을 더 빌리거나 사줍니다. 인물에 대한 책은 만화부터 유아용 위인전, 아동용 위인전 순으로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권을 읽게 했고요."

책은 이웃이나 친척에게서 빌려 보거나 할인서점.인터넷.출판사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구입했다. 집 근처의 공립도서관도 가족이 읽는 책의 주요 공급원으로 활용했다. "온 가족이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집에 돌아올 때는 일주일 동안 읽을 12~20권씩을 대여해 옵니다."

◆ '책 읽는 아이, 꿈꾸는 아이'가 되다="아이들이 행복하면 좋겠고, 숙제나 의무가 아닌 맘에 드는 장남감을 갖고 놀듯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이들의 책읽기에 대한 김씨의 생각이다. 그래서 김씨는 아이들의 책읽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배려한다. 책을 읽은 뒤 틀에 박힌 '토론'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읽은 책 내용을 물어보는 대신 아이가 늘어놓는 독서 '후기'에 대해 그냥 들어주려고 해요. 아이가 전쟁. 기아.장애.질병에 관한 책을 읽고 눈물을 보일 때는 꼭 안아주며 우리가 누리는 행복에 대해 알려주는 정도죠."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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