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화 주도 세모 자금원/「통용파」어떤 종교 조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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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세모 유사장 「재림예수」로 숭배/공동소유 주장 사채모집 독려/오대양교주도 신도… 구원파선 제명
오대양사건과 관련,사채행방열쇠를 쥔채 잠적한 송재화씨(45·여)가 주도한 「통용파」란 어떤 종교조직인가.
검찰은 송씨가 수십억∼수백억원의 사채를 끌어모아 회사를 설립하고 가게를 운영하는등 통용파를 조직해 유병언 사장과 손잡고 (주)세모의 자금원역할까지 한 것으로 보고 이들의 생성·조직·활동에 대한 조사에 나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용」이라는 말은 신약성서 사도행전 4장32절에 기록된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글귀에서 따온말.
물건의 공동소유로 차별받고 가난한 자가 없도록 하는 신앙생활을 뜻한다.
즉 종교적 사회주의를 실현,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사회 모순을 없앤다는 사회학적 교리를 담고 있다.
송씨가 이러한 이상적 교리에 눈을 뜬 것은 80년초.
당시 송씨는 서울 삼성동 상아아파트에 동료신도 20여명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며 구원파의 본당격인 서울 삼각지 기독교 복음침례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동양자수로 생활을 꾸려나가던 송씨는 집단생활이 곧 공동분배로 이어져 모두가 잘 살수 있게 된다는 교리에 물들었고 그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아 동료신도들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이 교리에 따라 (주)오대양이나 (주)세모의 대부분 근로자가 군거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곧바로 송씨의 매끄러운 설교에 빠져들어 낮에는 구원파교회에 나가 예배를 본후 밤에는 통용파 나름대로의 종교생활을 했다.
당시 송씨와 같이 집단생활을 했던 김모씨(48·여)는 『밤예배는 먼저 송씨가 공동생활·공동분배와 관련한 성경내용을 설교한후 기도·찬송 등으로 이어져 삼각지교회에서의 예배와 큰 차이는 없었으나 설교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고 말했다.
82년말 거주지를 서울 청담동 태양열주택으로 옮긴 통용파 신도들은 그해 8월 『공장을 세워 공동생산하고 이를 공동분배하면 더 잘 살수 있다』는 송씨의 꾐에 빠져 전국을 돌며 사채를 모집,오대양교주 박순자씨의 동생 박용택씨(38)를 중심으로 「미양코리아」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때 박순자씨도 물론 통용파였으나 회사설립에 통용파 20여명이 집단으로 참여하자 박씨가 전보다 훨씬 집단생활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삼각지 교회에 알려지며 「통용파」는 82년말 구원파 교회측으로부터 「이단」이라는 이유로 제명을 받았다.
통용파는 이때부터 태양열주택을 근거지로 서울·부산·광주·대구·대전 등지를 돌며 『말세가 다가오면 구원헌금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특유의 말세론을 펴며 신도들을 끌어모아 사채모집에 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세모의 유병언 사장을 「살아 있는 지혜자」「재림하는 예수」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인 교주로 떠받들면서 『하나님사업을 하는 유사장을 돕기 위해 사채를 모아야 한다』고 서로 독려했다.
검찰은 83년중반∼84년초 「통용파」신도수가 전국적으로 4백여명에 이르렀고 사채 수십억∼수백억원을 모집,이중 상당액수가 (주)세모로 유입됐을 것으로 보고있다.
당시 이들은 집단거주를 의무화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은 반드시 그룹단위로 했으며 개인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답습했다.
그러나 84년말 사채의 대부분을 쏟아 넣은 미양코리아가 70여억원의 부도를 내며 쓰러지자 내분이 생겨 「이꼬르파」(「같다」)는 뜻으로 「예수=유사장」이란 의미)「재림파」「광주엄마모임」「이리모임」 등 4개파로 갈라지게 됐다.
「이꼬르파」는 송씨를 중심으로 서울지역을 근거지로한 40∼50여명의 신도들로 구성,「유사장은 곧 예수」라고 굳게 믿으며 현재 청담동 일대에 20여명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
또 「재림파」는 유사장이 예수로 재림할때까지 방에서 꼼짝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83년 4월 구원파신도 20여명이 이들이 두문불출하는 청담동 AID아파트문을 부수고 들어가 탈진상태에 이른 10여명의 광신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적도 있었다.
「광주엄마모임」「이리모임」은 사채모집책들을 중심으로 통용을 실천하고 있으며 현재도 식당·가게 등을 운영하며 집단생활을 각도시에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약 80명규모인 「이리모임」은 현지대학교수 부부가 리더로 통용파 재건을 위해 집단생활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씨의 「이꼬르파」신도 20여명은 86년 6월 서울을 빠져나가 전남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새마을회관에서 통용생활을 다시 시작했으며 87년 8월까지 완도등지를 돌며 식당·미장원 등을 경영했다.
이들은 그후 빚독촉을 피해 경기도 안성의 한스농장 등을 돌며 피신생활중이며 일부는 아직도 완도에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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