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정치흥정" 냄새|정치자금법 협상 왜 미뤄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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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타결이 임박했던 것으로 보였던 여야간의 정치자금법 개정협상이 노태우 대통령-김대중 신민당 총재간의 16일 여야 영수회담 이후 결국 오는 9월 정기국회로 넘겨졌다.
민자·신민 양당은 이번 임시국회 개회 직후 정치자금법 개정을 위한 실무협상 팀을 구성, 쟁점사항인 ▲국고 보조금 증액 폭 ▲지정 기탁금제 존속 여부 등에 대해 절충을 벌여 상당한 폭의 의견접근을 보았다. 그러나 18, 19일 이틀간에 걸친 양당 사무총장 접촉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 협상이 결렬됐다.
총장회담 후 김윤환 민자당 총장은 『국고보조금 상향 폭 조정에 있어 여야가 팽팽히 맞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민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정기국회에서 처리키로 했다』고 밝혀「임시국회 회기 내 처리」의 당초합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공천헌금도 걸림돌>
법개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에 따른 혜택도 빨리 받게되는 이점을 노린 신민당측은 『명백한 약속위반』이라며 민자당의 연기방침에 정상적인 정국운영이 어려울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등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민자당이 타결을 호언장담했다가 이처럼 슬쩍 후퇴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깔려 있다.
민자당은 우선 ▲정치자금법 협상이 이번 회기 내에 타결되더라도 실제로 올해 추가 배분되는 국고보조금은 예산이 이미 확정되어 있어 더 늘어나지 않으므로 무리할 필요가 없고 ▲이미 양당이 합의한 국고보조금 배분비율에 대한 민주당 등 기타야당의 반발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기배경은 지극히 「표면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민자당은 정치자금법 협상을 9월 정기국회에서 가장 쟁점이 될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협상과 연계시켜 신민당 측과 흥정해 실리를 찾겠다는 속셈으로 풀이되고 있다.
여측은 8, 9월의 선거법 협상 때 대야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야당의 큰 약점인 돈줄을 쥐고 절충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지난 16일 민자당 당무회의에서 정순덕 의원이 정치 자금법 및 선거법의 개정협상을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한 이후 민자당에서 정기국회 처리주장이 득세하는 등 현저한 입장변화를 보였다.
여당은 국회의원선거구제의 보완 또는 변경 안을 마련, 대야협상을 할 방침인데 여측의 소선거구제보완 또는 대선거구제도입에 대해 신민당측은 모두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민자당측이 마련한 소선거구제 보완의 2개 방안, 즉 인구 상한선 35만명 및 30만 명의 선거구제에 대해 신민당은 심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두개의 안에서 분구되는 선거구가 부산과 대구 등 여당 아성지역에 몰려있어 신민당측에 크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당은 야측을 이롭게 하는 돈 문제가 걸린 협상을 서둘러야 할 절실한 필요성이 없는데다가 선거법 협상시 야당과 흥정을 벌일 수 있는 호재로는「돈」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민자당의 이 같은 연기배경에는 총선 정국을 앞두고 야측에 선심을 베풀어 「페어플레이」를 한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려는 고려도 작용됐다고 한다.
협상이 결렬된 데는 신민당 측이 「특별당비」(공천헌금) 인정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노-김 묵계 확대 해석>
여야 영수회담 이후 신민당은「정치자금법 13조 1항」삭제라는 새로운 쟁점을 제기해 협상의 공전을 자초했다고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주장했다.
정치 자금법 13조 1항은 「누구든지 공직선거에 있어 특정인을 후보로 추천하는 조건으로 정치자금을 기부하거나 받을 수 없다」는 공천헌금 금지조항.
신민당이 이 조항의 삭제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공천헌금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자는 의도다.
지난 노-김 회담에서도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야당으로서 특별당비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이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지정 기탁금제를 폐지할 수는 없으나 야당의 정치자금 확보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총재회담 후 김 총재는 신민당 의원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선거자금이나 정치자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이때부터 신민당의 협상태도가 반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신민당 협상 팀은 노-김간의 「묵계」를 확대해석, 공천헌금 금지조항 삭제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내각적으로 합의 본 유권자 1인당 국고보조 금액도 상향 조정해 치고 나왔다는 것이다.
국고보조금은 유권자 1인당 현행 4백원에서 8백원으로 인상하고 지정 기탁금제는 존속시키되 그중 제1당이 20%를, 나머지는 보조금 배분비율로 나눠 갖자고 신민당이 수정해 제의했다.
여야 영수회담 전 여야는 국고보조금을 유권자 1인당 6백원으로 하되 선거가 있는 해에는1인당 2백원을 추가인상, 특별보조금으로 지급토록 하고 지정기탁금 제는 존속시키는 대신정부·여당이 야당에 대해 전경련 등 경제단체로부터의 모금을 알선한다는 민자당측 수정안에 사실상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협상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민당은 이 사실상의 합의를 갑자기 거부하고 보조금 8백원 고수, 지정기탁금 중80%는 보조금 배분비율대로의 지급 등 수정안을 다시 제기하고 나서 여야협상을 교착상태로 몰아넣었다.
신민당으로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는 주장이다.
현재 국민 1인당 4백원 꼴의 정치보조금으로는 연간 25억원 안팎의 국고보조밖에 안돼 70명에 이르는 당직자 활동비와 1백70개에 이르는 지구당 운영비를 보조하기에도 빡빡한 액수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8백원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연간 64억원 정도의 국고보조가 이루어지고 그때서야 야당도 궁기떨지 않고 당의 기본살림을 꾸려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민중당도 배분 가능>
신민당은 또 기업들이 야당에 대한 정치자금 기부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치풍토에서 현재의 지정기탁금제는 여당만 배불리는 결과이므로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민자당은 지정기탁금제는 살려놓고 대신 4개 경제단체에 비지정 기탁금 형식의 협조를 당부하는 차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나 신민당은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민당 조희철 수석사무부총장은 『민자당이 지정기탁금제를 정 고집하면 그 차선책으로 총선·대통령 선거 등 선거 해에만 국민 1인당 보조금을 1천원씩으로 올리는 방법도 이미 제시하고 있다』면서 『이도 불가능하다면 현행법상 금지하고 있는 중앙당 헌금 명목의 특별당비만이라도 허용해 야당의 숨통을 틔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야간 유일하게 합의된 사항이라면 국고보조금 배분비율.
교섭단체를 구성한 단일 정당에 16.25%씩, 5인 이상 의석을 가진 비교섭단체에 7%씩, 5인 미만의 정당이라도 총선과 광역의회선거에서 유효투표수의 0.5%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 0.5%씩을 배분토록 한다는 것이다.
여야는 또 기본비율을 제외한 잔여분 중 반은 의석비율로, 나머지 반은 가장 최근 실시한 총선에서의 득표 비율로 배분한다는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국회의석이 없는 민중당도 국고보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점은 진보정당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경우 국고보조금 중 63.5%를 차지했던 민자당은 62.15%로, 신민당은 25.5%에서 29.45%, 민주당은 11%에서 7.9%의 몫이 돌아가며 민중당이 0.5%를 새롭게 배분 받도록 되어있다.
양당협상결과 민주당은 오히려 현행보다 혜택을 덜 받게되어 양당의 협상구도를「야합」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여야는 보조금 인상폭과 지정기탁금 제에 관한 이견 해소를 위해 8월중 선거법협상과 병행해 절충키로 했다.
23일 폐회식을 가진 임시국회본회의에서도 신민당 채영석 의원이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정치 자금법 협상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한데서도 드러나듯 야당이 정치자금의 국고보조확대에 거는 기대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다.
여야가 「돈」을 둘러싼 고난도의 정치흥정을 앞으로 어떻게 매듭지을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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