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학로 '연극열전' 기획 홍기유·장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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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여기 스스로를 '대학로 키드'라 부르는 두 남자가 있다. 서울예대 연극과 89학번 동기로 만나 틈만 나면 대학로로 향했다. 한 남자는 튀는 연극에 눈길이 갔고, 다른 남자는 따뜻한 연극이 좋았다. 취향은 극과 극이었지만 '연극을 좋아한다'는 전제 아래 이들은 단짝이 됐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두 남자는 "아마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며 엄청난 프로젝트 하나를 내놓았다. 이름하여 '연극열전'. 내년 한 해 동안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지난 20여년간의 연극계를 뒤흔든 중요 작품을 올리는 작업이다.

누구나 바랐던 일 그러나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팔 걷어붙이고 시작한 이들, 바로 영화감독이자 극작가인 장진(32)과 공연 기획자인 홍기유(33)다. 두 사람은 지난해 말 의기투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어가는 대학로를 살리기 위해서"란다.

"1980~90년대 대학로를 떠올려 봅시다. 정말 분위기 좋았죠. 분기별로 인기를 끈 작품들이 즐비했어요. 그때는 대학생도 연극 보러 많이 왔는데 지금은 연기 공부하는 학생들이 주류가 됐어요. 사라진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을 겁니다."(홍기유)

"지난 20여년간 공연된 연극 중 80년대 레퍼토리가 가장 뛰어나요. 영화는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데 연극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요. 좋은 인력이 영화로 가고…. 이번 프로젝트로 연극계에 새 바람이 일어나길 바랍니다."(장진)

두 사람은 지난 1년간 수십권의 연극연감을 뒤지며 작품 선정에 몰입했다. 선정 기준은 관객수.연극 비평.번연극이 아닌 창작극을 우선으로 했다. 목화.미추.연우무대 등 연극계에 큰 자리를 차지한 극단이 대거 참여하는 것도 의미 깊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물었다. 장감독은 서슴지 않고 '남자 충동'을 꼽았다. "남자의 본능을 예리하게 잘 파헤쳤다. 잘 다듬어 다시 꼭 올려야 하는 연극"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홍씨는 '청춘예찬'을 꼽았다. "작품이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야 거창했지만 문제는 돈이다. 총 15개의 작품에 10개 극단이 참여하고 수십명의 프로듀서와 마케팅 인력이 투입되는 이 대형 프로젝트에 드는 돈만 약 40억원. 작품당 공연기간이 1개월 이내여서 수익을 남기기도 힘들다. 두 사람은 "5억원 이상 적자가 나지 않겠느냐"며 "돈 벌자고 하는 짓이 아니니 괘념치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두 사람은 '연극열전'으로 인해 대학로에 프로듀서 시스템이 정착하길 바랐다.

장감독과 홍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왔다. 고교 3년간 총 2백50편의 연극을 봤다는 장감독은 일찌감치 연극과 영화계에 손길을 뻗쳤다. '택시 드리벌' '웰컴 투 동막골'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등은 그의 흥행 품목 중 일부에 불과하다. 내년에는 TV 드라마 '라스트 콘서트'의 메가폰을 잡아 드라마 PD로도 신고식을 한다.

반면 무대기술 스태프로 시작, 공연기획으로 자리를 옮긴 홍씨는 3년 전부터 극단 동숭아트센터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향후 연극 저작권 사업과 국제연극제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수많은 '연극의 추억'을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연극깨나 보셨네요"라고 말을 던지자 "관람만 했죠"(장진), "전 관망만 했습니다"(홍기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동적' 관람 또는 '단순한' 관망? 약간은 장난스러운 답변 속에서 이들의 반어적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연극이 죽는 꼴을 볼 수 없다고,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글=박지영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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