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하는 서 아프리카-독재자들 "가시방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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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 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ECOWAS) 16개 회원국 수뇌들이 이달 초 나이지리아의 아부자에서 정상 회담을 가졌다. l6개국 정상들은 이번 회담에서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협력이라는 본래 안건은 뒷전에 둔 채 정권 안보 협력 방안 논의로만 사흘간 일정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들 정상들이 이처럼 본래 안건이 아닌 다른 얘기에 골몰했던 것은 이들 중 과연 몇명이나 부재중 자신의 축출 소식을 듣지 않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국내 정치에서 위치가 취약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정상들은 대개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 국민 대부분을 피정복민 다루듯 통치하며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해왔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이들 정상들은 또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왔던 열강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정권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이들 서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던 당시 격렬한 타도 대상이었던 식민 종주국 프랑스에 독립 후 무역 거래의 95%를 의존하고 있으며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프랑스에 군대 파견을 호소해왔다.
이들 독재자는 특히 동구 공산주의 붕괴와 동서 냉전의 종언으로 인해 이 지역이 이데올로기 대결장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며 정권의 황혼기를 맞고 있다.
미·소등 열강은 최근 이들 독재자의 정권 안보에만 도움이 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종래 원조의 효율성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서아프리카 각국에서는 지하의 반정부 세력이 급속히 확장, 투쟁의 전면에 공개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9월이래 서아프리카의 독재자 3명이 하야하거나 피살됐다.
이중 국민의 압력에 굴복, 지난 3월 다당제 민주 선거에서 패배해 아프리카 최초의 선거혁명 희생자로 권좌에서 물러난 베냉의 마티외 케레쿠 전 대통령은 폭력에 의한 정권 상실이라는 비극은 면했다.
케레쿠는 72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출신지인 베냉 북부를 권력 기반으로 남부 출신자들에 대해 의도적인 차별 정책을 실시해왔으나 지난번 총선에서 개혁파 니세포네 소굴로 총리에게 패배했다.
1968년 역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말리의 무사 트라오레 대통령은 민주화 요구에 끝까지 무력 탄압으로 맞서다 베냉에서의 선거 혁명 사흘만인 지난 3월26일 전국적인 반정부 폭동의 와중에 이를 진압하던 군인들의 쿠데타로 축출됐다.
말리는 현재 아마두 투레 중령을 정점으로 군민이 함께 인민 구국 위원회를 결성, 다당제 선거의 조기 실시를 다짐하고 있으나 지난 16일 현역 대위인 내무장관이 주도한 불발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계속 정정이 불안한 상태다.
미국 해방 노예들이 건국한 아프리카 최초의 혹인 공화국 라이베리아의 새뮤얼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반군들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서아프리카 독재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나이지리아·감비아·가나·기니·시에라리온 등은 최대 반군 라이베리아 민족 애국 전선 (NPLF)의 혁명 수출을 저지하기 위해 자국도 불안한 판에 라이베리아에 연합군을 파견, 도 정권을 지원했으나 도 대통령이 피살되자 곧바로 약체 반군지도자 아모스 소야의 임정 구성을 지지, NPLF의 수도 입성을 차단했다.
ECOWAS 정상 회담에서 16개국 정상들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수도 몬로비아를 제외한 라이베리아 전역을 장악한 NPLF지도자 찰스 테일러를 설득하는데 주력했던 것도 이들이 얼마나 라이베리아 사대에 충격을 받았는지를 잘 증명해준 사실이다.
서아프리카 전문가들은 이 지역 독재자들이 아직도 개인 왕국의 향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은 반군들의 내전위협이 거세진 최근에야 다당제 정치 제도를 약속하고 있다. 카메룬은 폴 비야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 불복종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수백명의 학생들이 보안군에 체포되고 야당의 활동이 불법화됐다.
지난 81년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가나의 제리 롤링스 임시국가평의회 의장은 『인민 혁명의 다음 단계는 다당제 선거』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정치 집회를 금지시킨 법은 계속 유효하며 야당 인사들은 수배령에 쫓기고 있다. 가나는 아직도 간호사·교사들의 전국적인 파업이 계속되고 있다.
토고의 그나싱베 에야데마 대통령은 지난 3월 한달새 26명이 희생되는 국민 총파업에 몰려 야당 합법화·국민 투표 등을 약속,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나이지리아 군사 정부의 수반 이브라함 바방기다 장군도 13개 정당의 등록을 막으면서 어용정당 2개를 설립, 지난해 투표율 20%에도 못 미치는 지방 선거에서 승리했다. 바방기다 장군은 이같은 지방 선거 승리를 배경으로 현재의 군정을 민간 정부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대 국민 탄압 강화나 국가간 정권 안보 협력만으로는 오늘날의 반 독재 투쟁을 잠재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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