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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이 수준밖에 안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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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십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간 적이 있다. 신나게 관광을 하며 다녔다. 한데 어느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공해 때문이 아니었다.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들을 무심코 바라보다 '어?'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통 일본 차였다. 도요타.혼다.닛산 등 메이드 인 재팬 차들이, 새것도 아닌 낡디낡은 중고 일본 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하던 현지 교포는 "한 80~90%는 될 것"이라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일본제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말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인도네시아에서 몹쓸 짓을 많이 했고 패전과 함께 쫓겨났다. 하지만 일본은 떠난 게 아니었다. 패전 50여 년 만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발이 되어 거리를 쌩쌩 활보하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2003년 초 특파원 발령을 받아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무조건 현대 쏘나타를 샀다. 아는 사람들이 "일본 차를 사야 나중에 중고차 가격을 제대로 받는다"고 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물론 쏘나타는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카르타 생각이 자꾸 났다. 일본을 미워하진 않지만 출근길 워싱턴DC로 가는 66번 도로에 널려 있는 일제 차 행렬에 가담하기 싫었다.

애국자였다고 잘난 척하자는 게 아니다. 국산품만 애용하자고 주장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국내 시장도 개방해야 하고, 한국 기업들도 다른 나라에 진출해 경쟁하며 사는 세상이다. 외국 기업이라고 해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차피 승패가 갈리는 세상인데 기왕에 한국 기업이 이기면 얼마나 좋은가. 그건 이 땅에 태어나 자랐고, 한국 국적의 자식들을 키우는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최근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현대자동차 노사 모두에 대해서다. "워싱턴 갔을 때 쏘나타 괜히 샀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년 벽두에 신문(중앙일보 1월 4일자 2면)을 봤을 때 기가 막혔다.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은 사장을 폭행하고 시무식장에 소화기 분말을 뿌려 엉망을 만들었다. 노조원들을 막느라 허연 가루를 뒤집어쓴 직원들의 초라한 사진이 아직도 기억난다. 정의(正義)라는 거창한 단어는 쓰지도 말자. 입만 열면 역사네, 정의네 떠들어 대면서 기막힌 짓 하는 사람들투성이니까. 하지만 세상엔 최소한의 양식이란 게 있다. 초상집 가서 웃으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다. 마찬가지로 새해 시무식장에 소화기를 뿌리며 달려드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시민들도 화가 난 듯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현대차는 이번만큼은 절대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차 노조는 사과 대신 15일 불법 파업에 들어갔다. 이 수법, 우리도 잘 안다. 교통사고 났을 때 무조건 욕설을 퍼붓고 목소리부터 높이는 식이다.

현대차 노사가 밀고 당기는 '시늉'을 한 건 딱 이틀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현대차는 17일 노조에 격려금을 주고 대충 끝냈다. 막후에서 어떤 담합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이번만큼은…"이라며 성원했던 시민들만 황당하게 됐다.

현대차 불법 파업이 땜질로 마무리된 뒤 현대차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일주일 만에 무려 3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난 이제 외제차 사겠다"는 항의성 댓글도 한두 개가 아니다. 솔직히 고소한 생각도 든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은근히 걱정도 된다. 저렇게 현대차의 이미지가 망가지면, 만의 하나 현대차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럼 한국 경제는, 근로자들은,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에서다.

현대차 노사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정말 이 정도, 이 수준밖에 안 되나. 외국의 어느 길거리에서 현대차를 보면 고향 사람 본 듯 반기는 국민을 이렇게 배반해도 되는 건가. 정말 그 버릇 못 고치는가.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