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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세계 일류 되려면 더 많은 열정·도전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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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인가요." "선생님은 어쩜 옛 모습 그대로시네요."

최은희.문희.엄앵란씨 등 1950~70년대 톱스타 7명과 원로 디자이너 노라노씨. 30일 정오 만난 그들은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찌감치 은퇴한 이빈화씨 등은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노씨의 의상은 이들의 연기와 함께 60년대 한국 영화의 토대가 됐고, 오늘날 한국 영화.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들은 "노라노 선생처럼 숨은 원로의 공이 인정받아야 진정한 발전이 있다(최은희)"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또 그간 한국 문화의 급성장을 기뻐하면서 "기본에 충실하자(노라노)" "과거의 순수한 열정을 되찾자(엄앵란)"는 등의 주문도 했다.

# 한국 패션과 영화의 만남

최은희="연극.영화 등을 통틀어 선생님의 옷을 가장 많이 입었다. 선생님과 신체 사이즈가 같아 바쁠 때는 가봉도 대신 해주셨다. 캐릭터가 살고, 작품이 사는 옷이었다. 영화 의상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면서 한국 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최지희=영화제 때는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선생님께 의상을 의뢰했는데, 그 많은 여배우에게 각기 다른 스타일을 연출해 주신 게 신기하다. 당시 배우들이 출연 계약을 할 때 '의상은 무조건 노라노'라는 구절을 요구해 말들도 많았다(웃음). 신상옥 감독의 '자매정원'에서는 내가 디자이너였는데 실제 선생님 의상실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선생님도 재단사로 깜짝 출연했다."

노라노="최은희씨는 워낙 카리스마가 있어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면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엄앵란씨는 그냥 의상뿐만 아니라, 깜찍한 헵번 스타일로 이미지 메이킹 자체를 같이했다."

# 노장은 죽지 않는다

노라노="세계적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71세에 컴백해 패션쇼 1주일을 남기고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파리에 있었던 나는 '89세까지 현역으로 뛰자. 그럼 내가 샤넬을 이기는 거다'라고 다짐했다. 요즘 세상은 늙은이들에게 뒷전으로 물러나라 하지만 우리 같은 노장들이 오늘의 발전을 만든 것 아닌가. 우리는 돈도 명예도 몰랐고, 오직 열정 하나로 한 우물을 팠다. 세계 일류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더 많은 열정이 필요하다."

최지희="최근 한 젊은 배우가 '원로 배우들이 한 일이 뭐 있느냐'고 말하는 걸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원로를 대접하지 않는 사회엔 발전이 없다."

엄앵란="우리 때 배우들의 여건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직접 의상 가방 2~3개를 싸들고 다니면서 일했다. 의상 협찬이 어딨나. 배우가 출연료를 쪼개 일일이 사 입었다. 그렇게 의상비를 쓰고 나면 출연료가 항상 마이너스였다."

문희="60년대 5년간 활동하면서 200편에 출연했다. 초인적 스케줄에 겹치기 출연이니 요즘 배우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의 열정만큼은 요즘 못잖았다."

최지희="신 감독님이 지난해 별세하셨을 때 젊은 배우들이 장례식장을 찾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워낙 배우들을 통제하고 있어 배우들만 탓할 일도 아니기는 하다. 이런 게 산업화의 폐해가 아닐까."

이빈화="진짜 예술, 진짜 문화는 60, 70년대에 끝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젊은 영화인을 포함해 문화 전반이 돈만 바라고 열정은 부족하다."

# 우리 문화의 갈 길

김혜정="당시 선생의 의상들은 지금 봐도 여전히 아름답고 세련됐다. 시대를 뛰어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시대를 앞서면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또 선생은 멋지게 사는 여성의 모델도 제시했다. 멋지게 사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문화가 발전하는 것 아닐까."

이향자="당시 영화계는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 속에서의 성과가 오늘의 결실로 이어졌다. 60년대 없이 지금 같은 한국 영화의 전성기가 있었겠는가. 그때의 순수한 열정으로 과거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노라노="미국에서 활동할 때 느낀 것은 카피는 안 된다는 거였다. 내 의상이 먹힌 것은 동양적인 선 때문이다. 결국은 독창성이다. 한류도 마찬가지다. 독창적이고, 동시에 우리 안에서 자산을 찾아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열정을 자산 삼고, 목적의식 말고 도전의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목적의식을 가지면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모든 게 끝이지만, 도전의식을 가지면 하나가 끝나는 순간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다. 도전의식은 나를 흥분시켰고, 오늘날 나를 만든 원천이기도 하다."

글=양성희.강승민 기자

사진=박종근.김성룡 기자

노라노 나의 선택 나의 패션             ▶관계기사 27면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79.본명 노명자.사진)씨는 1956년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고, 80년대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에서 명성을 얻어 유명해졌다. 6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수 윤복희의 '초미니 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화려한 무대 의상이 그의 작품이다. 최은희.엄앵란.최지희.김지미.김혜정.이빈화.문희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모두 그의 옷을 입었다.

그는 28년 우리나라 초대 방송관리국장인 노창성과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인 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났다. 46년부터 미국 LA의 패션학교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50년 서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이라는 의상실을 열었다.

미국에서 그는 학업과 병행해 '타박'이라는 기성복 제조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실무를 익혔다. 56년 프랑스 파리의 패션학교인 '아카데미 줄리앙 아르 에콜'에서 수학했고, 이탈리아.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예술적 감성을 키웠다.

지난해 12월 6일부터 본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나의 선택 나의 패션'을 연재하고 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는 앞으로 70년대 파리 기성복 패션쇼에 참가한 일,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개최하며 활약한 일화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강승민 기자

(1) 최은희(78)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뒤 '어느 여대생의 고백(58)''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1)' 등에 출연하며 탁월한 연기력으로 60년대 한국영화계를 평정했다. 50~60년대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85년에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78년 홍콩에서 남편인 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 납북됐다 86년 북한을 탈출했다. 64년에는 영화 '민며느리'를 연출, 여배우 감독 1호 기록도 세웠다. 현재 안양 신필름예술센터 학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2) 이향자(78)

49년 16㎜ 영화 '풍랑'으로 데뷔했다. 이만흥 감독의 '결혼진단(55)', KBS-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등에 출연했다. 60년대에 한.중 합작영화를 찍기도 했다.

(3) 김혜정(66)

58년 영화 '봄은 다시 오려나'로 데뷔했으며 '아내는 고백한다(64)' 등이 대표작이다. 6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연기력을 겸비한 글래머 스타로 큰 인기를 끌었다.

(4) 엄앵란(71)

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했으며 '청춘교실(63)''맨발의 청춘(64)'등에 출연해 큰 인기를 얻었다. 64년 영화배우 신성일과 결혼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푸근한 이미지로 TV시트콤과 오락프로의 인기 패널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5) 최지희(67)

58년 영화 '아름다운 악녀'로 데뷔했으며, '김약국의 딸들(63)'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80년대엔 서울 한남동에서 수퍼마켓인 한남체인을 운영하며 사업가로도 수완을 보였다. 2004년 영화의 날 배우 부문 공로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영화인 원로회 회장을 맡고 있다.

(6) 이빈화(74)

영화 '청춘 쌍곡선(56)'으로 데뷔해 '순애보(57)''물망초(60)'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세련된 외모와 훤칠한 키로 스크린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7) 문희(60)

65년 영화 '흑맥'으로 데뷔해 '초우(66)''젊은 느티나무(68)' 등에서 열연했다. 윤정희.남정임과 함께 60년대 트로이카의 한 명이었다. 인기 절정이던 71년 당시 한국일보 장강재 회장과 결혼하며 은퇴했다. 현재 백상예술재단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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