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햄버거 시대 '대장금'이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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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먹는 것을 가지고 진정한 문화의 수준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산업화시대를 휩쓴 패스트푸드가 저급한 문화로 밀려나면서 생기는 빈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는 여러 나라가 경합을 벌이는 전략적 각축점이다.

이탈리아가 그들의 전통화덕 피자를 지키기 위해 패스트피자 강국들을 상대로 펼치는 피자전쟁, 샴페인 명칭을 독점하려는 프랑스의 지적재산권 시비, 와인 산지를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은 헝가리의 포석, 그리고 김치와 기무치 사이에 표준획득을 둘러싸고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한판 승부에서 이런 각축의 긴장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화전략과 경제전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 한국음식 경쟁력은 몇점일까

'중국 음식은 혀로 먹고, 일본 음식은 눈으로 먹는다'고 한다. 중국 음식은 미각의 창의성으로, 일본 음식은 미적 완성도로 각기 정체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정체성은 나라 안을 향할 때는 공동체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문화적 언어'가 되고, 나라 밖을 향할 때는 브랜드이자 경쟁력이 된다.

우리 음식이 해외에는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 실은 국내에 있으면 잘 알지 못한다. 미국에서 비빔밥집이 성업 중이라거나 중국에서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바람에 김치 수요가 늘었다는 외신이 간간이 들려온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비빔밥을 찾는 이유가 싸고 푸짐하기 때문이라면 뉴욕의 뒷골목 문화를 벗어날 수 없다. 김치를 찾는 이유가 사스에 대한 약리효과 때문이라면 결국 약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려면 우리 음식이 담고 있는 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비빔밥에는 오색오미의 화합으로 음양오행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이 있고, 차고 더운 재료가 서로를 돋보이게 돕는 어울림의 미학이 있다. 그뿐인가. 살얼음이 서린 동치미 국물은 시간의 흐름에 켜켜이 내려앉은 기다림의 맛이고, 하늘과 땅이 한데 어울린 너그러움의 맛이다. 젖빛 보시기 속에 천.지.인을 아우른 동치미의 미학, 비빔밥을 완성하는 고명의 문화적 함의…. 이런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공감이 있을 때 비로소 한국 음식은 세계와 문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이런 욕심은 지나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과도 음식이라는 문화적 언어로 소통하기 어려운 상태니. 젊은 세대는 인절미보다 피자를, 구절판보다 샐러드를, 초고추장보다 칠리소스를 찾는다. 패스트푸드와 화학조미료에 입맛이 길들여져 전통의 천연양념과 손맛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음식에 대한 인지와 선호는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현격히 떨어진다. 젊은층이 나이가 들면 부모세대처럼 우리 음식을 알고, 좋아하고, 조리할 수 있을까. 낙관할 만한 근거는 희박하다. 오히려 세대교체와 더불어 우리 음식문화는 이 땅에서조차 '소수문화' '주변문화'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보면 기우일지.

입맛의 세대 단절, 즉 부모와 자식 간의 식탁의 단절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경제발전의 대가로 감내해야 할 당연한 부산물도 아니다. 우리 음식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외국 음식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낳고, 그것이 다시 우리 음식문화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장인의 솜씨로 만든 궁중요리

우리의 미각을 되찾고 우리 음식을 사랑하기 위해선 문화적 자긍심이 전제돼야 한다. 자긍심은 음식의 역사.철학.미학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오색오미의 어울림, 음양과 시간을 아우른 철학, 다양한 시절식(時節食)의 예방의학적 효용, 김치와 젓갈, 그리고 숨쉬는 옹기에 스민 발효과학 메커니즘, 떡살 등 기명(器皿)에서 꽃피운 전각문화…. 우리 음식문화의 넓이와 깊이는 '음식의 시대'로 불리는 21세기에 세계를 주도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마침 궁중음식을 다루는 TV드라마가 대중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우리네 궁중음식은 궐 밖 평민의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간의 재료와 조리법을 주방상궁과 숙수(熟手) 등 최고 장인의 솜씨로 완성했고, 그것이 다시 상물림의 전통으로 평민의 반상과 순환했다. 한국음식문화의 정수인 셈이다. 우리 음식에 대한 모처럼의 관심이 자긍심으로 꽃피고, 문화전략과 경제전략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