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니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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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OO는 A를 좋아한다." "S선생은 ××다."

장난기 있는 사람이라면 어릴 적 학교 화장실 벽에 영문 이니셜(initial)을 곁들인 낙서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니셜은 입구 또는 시작을 뜻하는 라틴어 'initialis'에서 비롯됐다. 중세 때는 주로 약식 서명이나 소유.가문의 상징으로 쓰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신분을 가리는 방법으로 더 자주 활용되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번창에 따라 '알 권리 충족'과 '사생활 보호'라는 충돌하는 두 가치 사이에서 이니셜이라는 절충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니셜이 효과적인 폭로 수단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실명을 썼을 때보다 네티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톱 가수이자 재벌 회장의 부인이었던 배인순씨가 최근 쓴 자전소설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 잔'은 이니셜과 인터넷의 '공조'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설에는 회장이 C씨로, 그와 관계를 맺은 여자 연예인들이 L.K.E.J씨로 등장한다. 다음은 발간(16일 오전) 이후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 벌어진 시간대별 주요 상황.

오후 1시(16일):남편 C씨는 崔OO이다.

오후 5시:L.K.E.J씨는 누구 누구일 것.

오후 9시:그들 중 한명은 OOO다.

오전 1시(17일):3명이 확인됐다.

오전 9시:완결판! 등장인물 모두 확인.

책이 나오자마자 네티즌은 실명 찾기에 돌입했다. C씨는 워낙 유명해 금방 찾아냈다. 이후 수백명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정보를 나누면서 연예인들을 추리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도 안돼 '미확인'완결판을 만들어냈다. 애초 실명이었다면 이렇게 주목하지 않았을 게다. 화장실 낙서가 학교 안에 퍼지는 데 한 달이 걸린다면 인터넷에 올린 이니셜은 하루 만에 온 국민이 그 실명을 알게 되는 세상이다.

인터넷에는 게이트 키퍼(Gate Keeper)가 없다. 남을 아프게 하는 내용도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1999년 'O양 비디오' 사건에서 우리는 이미 첫 희생자를 봤다. 법원은 인터넷 명예훼손을 '화장실 낙서'에 비해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2000년 인터넷 명예훼손 사범에 첫 실형 선고). 그럼에도 이니셜이 인터넷에서 갈수록 날뛰고 있다. 이니셜 명예훼손 특별법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