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점왕 김도훈, '썩은 감자'수모 확 떨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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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독기(毒氣)'입니다. 잘 나갈 때가 아니라 힘들 때 격려해 준 주위 친지와 성남 일화 코칭 스태프, 그리고 한마음으로 저를 도와준 동료 선수들에게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16일 프로축구 K-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두 골을 몰아넣어 브라질 출신 골잡이들을 제치고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한 '토종 폭격기'김도훈(33.성남)의 말에는 고통을 이겨낸 자의 자신감과 겸손함이 한데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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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3연패에 기여했고, 득점왕까지 올라 2관왕을 차지한 김도훈. 윤상철(전 LG)이 갖고 있던 정규리그 한 시즌 최다골(21골) 기록을 단숨에 28골로 늘려 놓았을 뿐 아니라 이제 최우수선수(MVP) 타이틀에도 도전한다. 3년 연속 우승팀의 주득점원인 그가 MVP가 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만약 MVP에 등극한다면 3관왕을 차지하면서 최고의 한 해를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독기'라니. 힘들 때 격려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얘기는 무슨 말인지.

지난해 한.일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김도훈'이라는 존재는 차갑게 잊혀졌다. 그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를 버리고 공격 선봉장으로 황선홍과 최용수를 택했다. 그는 후배들이 '월드컵 4강 신화'의 영광을 만끽하고 있는 장면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썩은 감자'가 돼 있었다. 전북 현대의 조윤환 감독은 '다른 감자'가 함께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썩은 감자' 김도훈을 버리겠다고 했다. 버려진 김도훈은 둥지를 성남으로 옮겨야 했다.

선수생활의 기로에 섰지만 그의 표현대로 '독기'를 품고 다시 일어났다. 그가 올 시즌 세 차례나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28골을 몰아치리라고 예상한 축구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해보다 브라질 출신 특급 골잡이들이 즐비했던 올 시즌, 그가 득점왕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없었다. '독기'라는 그의 말이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지난해는 김선수에게 최악의 해였다. 혹시 히딩크 감독과 조윤환 감독에 대한 감정의 앙금은 없나.

"지난해 선수생활을 접었다면 두 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앙금이 없다. 그 힘든 시간들 때문에 오히려 성장할 수 있었고, 대기록에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당시에는 섭섭한 감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의 기쁨이 그 시간들에 대한 보상 같다."

-힘들었던 시간에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했나.

"지난 겨울에는 지방을 돌며 골프를 치면서 나쁜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혼자 있으면 그간 전북에서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과 고생했던 일들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북 시절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나.

"우선 코칭스태프와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전북에서는 오로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지시뿐이었다.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실력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팀 전력이 좋다 보니 혼자서 팀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

-김선수에게는 늘 '국내용이다, 아시아권에서만 통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 보니 그런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나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다. 국내나 아시아에서는 통하는데, 힘 좋은 유럽팀에는 먹혀들지 않는다. 또 나는 주변에서 건네주는 기회를 잡아 마무리를 하는 스타일이다. 성남에서는 지원해주는 선수들이 많아 좋은 성적을 냈지만 대표팀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K-리그 11개 팀 가운데 가장 힘든 팀은 어딘가. 또 귀찮은 수비수와 골키퍼는.

"대구 FC가 가장 불편하다. 지역방어도 안하고 오로지 1대1로 따라붙으니 정말 불편하다. 수비수는 대구의 김학철 선수가 가장 귀찮다. 골키퍼는 역시 김병지(포항)와 이운재(수원)가 가장 어려운 상대인데, 올 시즌에는 둘을 상대로 모두 골을 뽑아냈다."

김도훈은 18일 불가리아와의 A매치에 출전한다. K-리그에서 원없이 '한풀이'를 한 김도훈이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전에서도 멋진 골을 터뜨려 주기를 팬들은 원한다.

정영재.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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