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6)제86화 경성야화(1)-조용만|내가 태어난 널다릿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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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가 출생한 1909년은 일본이 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를 빼앗아간 바로 1년 전이다. 1909년은 융희 3년이었는데 그 이듬해인 융희 4년에 우리 나라는 완전히 일본한테 먹혀서 망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보다 4년 전인 1905년에 우리 나라는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자주 독립을 잃어버렸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통감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보호국이란 외교권만 박탈당하는 것이지만 이를 기화로 모든 국권이 몰수돼 가면서 군대도 해산 당하고 모든 행정이 이토통감의 감독하에 들게 되었다. 이토가 명실공히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된 것이었다.
이를 본 우리 국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서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하얼빈에서 총살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 삼아 한일합방을 급속히 진행시켜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10년에 대한제국의 명맥을 아주 끊어버렸다.
내가 출생하던 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암살이 있었고 그 이듬해 8월에 한일합방이 강행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그전부터 호적이 있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그전 것은 다 없어지고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새로 호적을 만들었다. 따라서 내 생년월일도 「명치42년 3월10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을 1945년 해방 때까지 써왔고 해방 후에는 「단기 4242년 3월10일」로, 최후에는 다시 「서기 1909년」으로 각각 변천을 거듭해 왔다.
내가 출생한 곳은 당시 이름으로 한성 중부 장통방 판교동 49통 10호였고 나중에 경성부 장사동 22번지로 바뀌었다.
지금의 종로3가 단성사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행랑뒷골」이라고 하는 큰길 뒤 좁은 골목이 나오는데 그 행랑뒷골을 동쪽으로 10m쯤 내려가면 또 남쪽으로 뚫린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을 들어서면 작은 개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있고 그 개천에 널판때기 두 목을 나란히 놓은 나무다리가 있었다. 이것이 판교이고 우리말로 「널 다리」라고 불렀다.
우리집 동네를 「널 다릿골」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까닭인데 이 골목으로 쭈욱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큰 기와집이 나온다.
그 집은 꽤 넓은 집으로 대척이 있는 안채, 큰 사람·작은사랑으로 돼있는 사랑채, 챗방에는 동챗방·남챗방 둘, 뜰 아래로 아랫방, 뒤깥에 큰 광·작은광, 사랑뜰에 넓은 동산이 있고 그밖에 큰 행랑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줄잡아 50∼60칸은 됐을 것이다. 이 집에 조부모·둘째 숙부·셋째 숙부모·우리 부모·사촌들·종조모들, 그밖에 친척들이 한솥밥을 먹고살았으니 4대가 동거하는 대가족이었다.
널다릿골 동쪽이 중부골이고, 거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나가면 화리껴다리라는 큰 돌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가 청계천에 놓인 다리인데 그 오른쪽으로 새로 만든 관수교가 있고, 또 그 위로 수표교·장찻골다리(장교) 등이 있었다. 화리껴다리 아래로 호경다리·마전다리 등이 동대문까지 잇따라 걸려 있었다.
나는 여덟살 되던 봄까지 이 장사동에서 살았는데 기껏해야 관수교·화리껴다리 언저리까지밖에 가본 일이 없고 수표교도 세배 다닐 때 어른들을 따라서 가본 정도였다.
화리껴다리를 건너면 조산이라는 모래로 쌓은 높은 산이 있었는데 청계천 모래를 파내 산같이 쌓아올린 것이었다. 놀이터는 고작 이 조산에 가서 노는 것이었고 청계천에는 장마 때가 아니면 시커먼 구정물이 흐르고 냄새가 심해 들어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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