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버려야할 환상(장두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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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1세기에 이르러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졌을때 한미관계의 성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대사가 연말 한국외교협회에서 행한 연설중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형태를 약간 달리해 이미 지금의 한미관계를 조건지우는 외부환경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것은 곧 미국이 소련·중국 등 냉전의 상대방이 더이상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지 않은 지금상황에서 과거 냉전의 동맹국들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대만·필리핀·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국가들도 모두 미국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상황변화에 대한 재평가와 재조정을 통틀어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의 폭과 길이는 질적인 것이다. 2,3년전만 해도 필리핀은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만 해군기지의 사용료를 더 받아내려는 협상에서 배를 내미는 입장에 있었다.
소련이 베트남의 캄란을 남태평양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형편에서 미국은 필리핀 기지를 포기할 수 없는 궁지에 있었다. 그래서 아키노 대통령은 배짱을 튀길 수 있었고 필리핀을 방문한 체니 국방장관의 면담요청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협상의 우열관계는 급속히 변하고 있다. 소련이 군사적 대결을 더이상 계속할 수 없는 형편에 몰리게 됨에 따라 아시아 각국이 갖고있던 전략적 가치는 급속히 평가절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 해군의 퇴조현상을 보면서 베트남은 미국이 다시 캄란만의 해군시설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암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기지사용료를 내라는 단서가 붙어있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를 흘리며 탈환했던 군사기지를 돈만 내면 다시 그 전쟁의 주역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는 입장변화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략적 변화의 질적 농도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냉전의 후견세력이 물러남에 따라 중동과 유럽에서 보듯 국지분쟁의 격화를 몰고올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싱가포르는 필리핀 대신 미 군사력의 후보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필리핀에 있던 미 공군의 F­16과 F­18 전투비행단은 이미 싱가포르로 떠났다.
그러나 경제면에 있어서는 아시아가 갖는 비중은 군사적 중요성이 퇴조하고 있는 것과 반비례해 커가고 있다. 우리는 국내문제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제적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자체 평가는 외부에서 보는 평가와는 크게 거리가 있다. 소련과 중국이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는 현상은 물론이고 미국이 한국 시장의 완전개방을 위해 끈질긴 압력을 가해오고 있는 것도 역으로 보면 한국·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 잠재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뿐이 아니다. EC를 비롯해 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동아시아에 비교적 무관심했던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이 지역의 번영에 참여하려 하고 있다.
그 구체적 움직임이 태평양경제협력회의(PECC)와 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APEC) 등 지역협력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비교적 냉담했던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캄보디아 분쟁해결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21세기 동아시아·태평양권의 번영을 겨둔 활발한 움직임의 하나다. 이 마지막 분쟁을 해소시킴으로써 경제교류를 막는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허물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번 노대통령의 방미에서 나타난 미국측의 새 아시아질서 구상은 이와 같은 상황변화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이제 미국보다는 이 지역국가들의 이해가 크다는 전제아래 미군사력의 계속 주둔을 위해 분담금을 크게 올리라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 군사력 감축이 뒤따를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경제면에서는 국내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 까지를 포함한 철저한 시장개방,그리고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한 미국측 입장을 지원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21세기의 변한 세계속에서 한미관계의 성격은 어떤 것이어야 되느냐는 우리 시각의 답안을 내놓아야 할 차례다.
그 답안의 골자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움트고 있는 경제번영의 협력체제하에 한국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그 핵심을 이뤄야 될 것이다.
일본의 압도적 역할을 견제하고 소련·중국·아세안 등 새로운 경제 주역들이 참가할 이 협력체제에서 한국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크며 미국측 시각으로 다가오는 새질서에 대해서도 견제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첫 과제는 40여년간 몸에 밴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미국이 대가없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든가 어려움이 있으면 의지하려는 사대주의와 함께 감정적 반미에서 다같이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우리 힘을 빌려야할 상황이 많아지도록 경제·외교분야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이익이 미국 이익과 합치될 수 있는 폭을 넓혀나가야 된다. 그레그 대사가 역설했듯이 21세기의 국가관계는 「영원한 우방은 없고 오직 영원한 이해관계만 있을 뿐」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명심하면서­.<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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