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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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록을 보면 서울 장안을 병풍처럼 둘러 싼 도성의 총길이는 9천9백75보였다. 1보가 6척이니 요즘 척도로 치면 약 17㎞가 되는 셈이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12m정도였다.
이태조가 1394년 서울로 천도하고 2년뒤인 1396년에 축성한 이 성곽은 북악·인왕·남산·낙산의 네 산마루를 교묘하게 연결시켰는데 성곽둘레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4대문,그 중간중간에 4소문이 있었다.
태조는 이 성곽을 쌓을때 전국에서 약 20만명의 인력을 동원해 농한기를 이용한 98일간의 공사끝에 서둘러 작업을 끝냈다.
축성 당시에는 인왕산에서 무악(안산)과 만리재를 거쳐 남산으로 연결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날밤 눈이 왔는데 지금의 도성안쪽은 눈이 녹았고 바깥쪽에만 줄을 그은듯 눈이 그대로 있어 결국 안산을 제외시켰다고 한다.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태조는 건국초기 여러가지 할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이 성곽을 쌓으면서 일부 구역은 석벽 대신 흙벽으로 메운 곳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남산자락이었던 지금의 장충단공원뒤 남소문과 동대문을 연결한 토성이었다. 물론 이 토성들은 나라가 안정된 세종조에 모두 석성으로 개축됐다.
그래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쓴 태조때의 축성법과 돌을 네모로 반듯반듯하게 다듬어 쓴 세종때의 축성법은 지금도 비교가 된다.
그런데 서울시는 오는 94년으로 다가온 서울 정도6백주년기념사업인 남산 제모습찾기의 일환으로 장충단길로 끊어진 남산의 능선과 타워호텔 뒤편의 능선을 도로는 터널로 연결시킨채 매립,옛성곽을 복원할 모양이다. 바로 남소문이 있던 자리다.
이 장충단 길은 조선조 초기만해도 산마루의 남소문을 통해 서울을 왕래하던 행인의 발길이 꽤 잦았던 곳이다. 그런데 예종원년(1469년) 동남방을 개방하면 도읍의 기가 빠져나가 화를 미친다는 풍수지리설때문에 남소문과 함께 폐쇄했었다. 이것이 일제때 도로가 확장되면서 산등성이를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남산의 복원으로 남소문은 정말 오랜만에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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