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체육회 회장선거 국내서 법정싸움 2라운드-LA도산체육관장 김용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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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해 11월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이민 온지 23년이 되는 김용길(52·LA도산체육관장·태권도8단)씨는 앨버트(22·버클리대 4년) 레니(21·캘리포니아주립대 3년) 캐린(18·UCLA1년) 등 1남2녀를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지금 서울로 간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아빠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내가 마치 재미대한체육회장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리배처럼 되어 버렸다. 평생을 태권도와 함께 살아온 무도인으로서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명예를 되찾기 위해 한국에 간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명예를 되찾고 오겠다.』
그로부터 6개월하고도 24일이 지난 91년6월19일 서울동부지방법원은 김씨가 대한체육회 (회장 김종렬)를 상대로 한 「90년1월 재미내한체육회 대의원총회결의 유효확인」 소송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승소판결을 확신했던 김씨는 반년이 넘도록 혼자 기거했던 잠실의 여관방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그리고 미국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부인 김수자(46)씨의 어조는 단호했다. 『끝까지 싸워서 밝혀내세요. 당신 한사람의 명예가 아니라 우리가족, 그리고 지난 19년 동안 당신에게 태권도를 배워 나간 5만여명의 태권도가족의 명예를 되찾는 일이에요.』
경기공고→경희대를 거쳐 결혼과 함께 부부유학생으로 김씨가 LA로 건너간게 지난 68년.
결국 3년만에 공부는 포기하고 말았지만 서울아현국교 1년 때부터 시작한 태권도실력 (당시 국기원랭킹 15위)을 바탕으로 USC(남가주대) 내에 최초의 태권도서클을 창설하기도 했고 학창시절 매료되었던 흥사단미국지부에서 교포자녀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던 경험으로 도산체육관을 시작했다.
『72년 당시만 해도 태권도라는 용어를 쓰는 곳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가라테가 성행해 LA외곽에 2∼3곳의 코리언 가라테 스튜디오가 있었지요.』
김씨는 정면대결을 작정했다. LA시가지를 지역적으로 삼분하고있던 가라테체육관들의 복판인 다운타운에 가라테도장의 두배가 넘는 2백50평 규모의 창고를 임대, 태권도장 간판을 내걸었다.
지금도 운영중인 니시하마 가라테도장 같은 경우 일본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있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김씨는 가라테와의 기술적인 차별화를 위해 무보다 도로서의 태권도에 중점을 두고 충 효 예 등을 강조하는 정신도덕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자 교포들은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가라테도장의 견제도 물론 만만치 않았다. 각 도장들이 번갈아 가며 중견급 대표선수를 신입회원으로 위장시켜 김씨와 대련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였기 때문에 결국 나하고 대련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친구는 팔을 부러뜨렸고 또 어떤 친구는 어깨를 뽑혀 병원으로 후송되는 등 오는 대로 혼을 내줬더니 나중엔 가라테도장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는 나를 초대하더군요.』
김씨는 19년이 흐르는 동안 제자들의 도장 36개, 유단자 제자만 9백여명을 배출해 냈다.
『LA의 도산체육관은 한마디로 군대의 보충대 같은 역할을 하게됐습니다. 유학생은 물론 모든 이민가족들이 LA에 머무르면 도산체육관을 거쳐가게 되는 것이죠.』 LA한인회에 기여한 공로로 외무부장관표창(78년), 체육회부화장으로 10년 넘도록 매년 전국체전에 참가한 공로로 체육부장관표창, 한글학교로 인해 문교부장관표창 (이상86년)도 받았다.
이런 김씨가 대한체육회를 상대로 반년이 넘도록 객지(?)에서 소송을 제기, 다시 항소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법적 투쟁을 하고는 있지만, 한인체육회장자리가 탐나서가 결코 아닙니다. 누명을 벗자는 것이죠. 그리고 민주주의의 최첨단국가에서 살고있는 교포사회 내부에서 아직도 자신들이 이곳으로 건너올 당시의 작태를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일부 교포 인사들에게 경종을 울려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지난해 1월 제6대 재미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 2차 투표 끝에 당선됐으나 낙선한 이민휘 후보가 이의를 제기, 대한체육회는 자체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의원자격에 하자를 인정, 재선거를 지시해 결국 이 후보가 제6대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조사과정에서 김씨는 대한체육회 신동욱 (대한궁도협회장) 부회장의 말만 믿고 재선거에 합의, 각서를 써준 것이 이번 소송의 결정적 패인.
김씨는 낙선 후 「부정대의원을 출석시켜 회장에 당선됐다」는 교포사회로부터의 누명을 벗기 위해 홀로 조사에 착수, 이들이 모두적법한 대의원이었음을 밝혀낼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서울에와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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