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2)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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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경에서의 명암>
감쪽같이 사라졌던 한성수 열사의 유해는 뜻밖에도 일본에 가 있었다. 까닭인 즉 한성수 열사의 민족적 수절과 장부다운 최후에 경탄했던 어느 일본인이 모셔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수께끼일 뿐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후 열사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학병출신인 정기영씨(1·20학병동지회 부회장)의 품에 안겨서 그가 목숨과 바꿨던 조국 땅으로 돌아왔다. 정기영씨는 지금도 마무리가 안된 전몰 진혼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열사는 그의 고향 신의주 땅에는 가지 못했으나 지난 19일 미국에서 달려온 미망인 정숙저(70), 동생 한성렴(63)씨, 그리고 옛 전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순국한지 실로 47년만의 진혼이었다.
한성수 열사는 먼저 말한 교포재벌 계창식씨와 접촉하던 중 일본헌병대 밀정 김사회에 의해 밀고돼 체포된 것이다. 이 소식은 곧 한성수 동지의 소속 부대인 중국 안휘성 부양에 있는 광복군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에 알려졌다. 비통과 울분에 빠졌던 제3지대에서는 곧 진상조사와 밀정 김사회를 처단하기 위한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그 당시 부양 제3지대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해 온 학병 33인이 있었는데 그중 25인(김준엽·장준하·윤경빈 등)은 이미 중경으로 떠났고 최전방에서 원수와 대결하겠다는 열혈한 8인만이 남아있었다.
그 중 한사람이 한성수였다. 남아 있는 학병들은 모두 전우 한성수의 원수를 갚겠다며 결사대에 지원했다.
김국주(해방 후 국군 예비역중장)를 장으로 하는 결사대 제1파는 45년4월 상해에 잠입, 손창식과 회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손은 우리 요구에 대한 답변을 내일 자기 사무실에서 하겠으니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공작거점에 돌아 온 김국주는 중경에서 직접 파견된 선배 공작원과 숙의한 끝에 「일본군의 경계가 엄한 군수공장으로 손창식을 찾아간다는 것은 폭탄을 지고 사지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판단, 이 공작은 중지되었다(김국주씨 증언).
제2파는 45년 7월에 떠났다. 여기에는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 탕은백 장군의 특별한 배려로 중국군 무전통신병과 통역이 배속되었다. 책임자는 전리호(일본 중앙대 출신). 그러나 이들은 상해로 가는 도중 해방을 맞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전리호씨 증언, 현 독립유공자협회 이사).
이토록 친일 군납업자 손창식과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이라는 정항범이 만든 화근은 중경 임시정부에 파급되었고 끝내 젊은 광복군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었다.
4월29일, 이날은 우리들이 상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날 귀국선이 떠난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윤봉길의사 의거 15주년이었다. 영국 함대 팀과 우리 교포 팀 간에 축구 친선게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홍구공원을 찾은 김영주와 나는 끝내 이곳에 윤 의사의 표지 하나 세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고있었다.
이때 아까부터 우리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헙수룩한 차림의 그를 중국사람으로 알았던 나는 그가 뜻밖에도 조선말을 하기에 깜짝 놀랐다.
50세 가량의 그는 앞니가 튀어 나왔고 다리를 좀 절고 있었다. 그는 이충모라며 자기소개부터 했다. 보기에는 시골학교 선생 같은 풍모였으나 눈에서는 빛이 났고 그의 말은 불을 토하듯 정열에 넘쳐 있었다.
『아까부터 당신네들 이야기를 잘 들었소. 중국에 와서 독립운동 했다는 사람들이야 많지요. 그러나 진짜 애국자는 오로지 윤봉길 의사 한 분밖에 없습니다. 윤 의사 때문에 김구는 비로소 장개석을 만날 수 있었고 낙양 군관학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창설된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그 훈련반을 조선사람들이 깨버렸지요.』
『왜 그렇게 됐습니까.』
『들어보시오. 그때 임정의 힘이라고는 1백5명의 훈련대원 밖에는 없었소. 그래서 훈련책임자인 지청천이 그 힘을 배경으로 임정주석을 노린다는 모략과 시기 때문에 깨지고 만 거지요. 모두 다 조선사람들이 한 짓이었소. 이역만리 독립운동 하러 왔다는 것들이 그런 꼴이니….』
『그렇게 단결이 안돼 있었나요.』 『조선사람 사는 곳에 무슨 단결이 있겠소. 중경이라는 그 좁은 고장에서 말이오.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김고산(일명 김원봉)의 「조선 민족혁명당」이라는 두 파벌이 있었고, 그 밑에는 또 자질구레한 족당들인 유림의 「무정부주의연맹」, 김창숙의 「민족해방동맹」, 신익희의 「조선민족투쟁동맹」, 정화암의 「조선혁명자동맹」따위들이 담뱃대나 두들기면서 자리다툼하는 것이 일이었지요.』『선생은 어느 당이었습니까.』
『예, 나는 한 마디로 우익보다는 좌익이었소. 그러나 시베리아에 가보고 또 연안에 가 본 다음에는 그만 정이 떨어졌소.』 『연안에 대해 정이 떨어지셨다니 그건 왜지요.』
『갖은 고생을 하며 연안에 찾아갔더니 「조선독립동맹」 김무정 장군이란 자가 나를 일본군 밀정이라고 누명을 씌워 중국 측에 고발, 나는 3년간이나 재판을 받고 연안에서 추방당했어요. 그것도 중국 측 재판이라 살았지 조선독립동맹에서 재판했다면 며칠만에 총살당했을 겁니다.
그네들은 아무리 열렬한 공산당이라 해도 자기 파가 아니면 가차없이 없애버립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당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의 이야기는 모두가 부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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