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현상수배극' 내건 박진표 감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년)은 그중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소재다. 과학수사의 'ㄱ'자도 찾기 힘든 코미디 같은 상황을 빌려 비극과 유머를 버무려냈다. 민생치안은 뒷전이고 데모진압이 우선이었던 80년대의 시대적 공기를 포착했다. 주인공은 강력계 형사다. 번번이 허탕을 치면서도 '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열망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농촌이 무대였던 '살인의 추억'과 달리 '그놈 목소리'는 서울의 아파트촌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주인공은 경찰이 아니라 아들을 유괴당한 부부다. 유괴범은 집 전화와 카폰과 메모로 이어달리기를 시키듯 지시를 내린다. 부부는 그에 따라 도시 곳곳을 내달리고 헤매면서 처절하게 허물어져 간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힘은 이 두 사람이 겪는 긴장과 감정이다. 드라마의 변곡점을 여러 번 만들었던 '살인의 추억'과 달리 '그놈 목소리'는 단선형 구조를 이룬다.

'그놈 목소리'의 범인(강동원)은 목소리와 모자를 눌러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살인의 추억'에 비하면 좀 더 손에 가까이 잡힐 것만 같다. 하지만 결코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눈물과 땀에 범벅이 된 부부를 한걸음 앞서 지켜보는 모습은 익명의 절대악에 가깝다. 주인공의 뉴스 코멘트를 통해 '범죄와의 전쟁'이 언급되는 것도 시사적이다.

박진표(사진) 감독의 새 영화 '그놈 목소리'(2월1일 개봉)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현상수배극이다. 1991년 아홉 살짜리 초등학생이 유괴 살해된 실화가 바탕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신변조차 밝혀지지 않은 범인을 향해 "너를 잡고 싶다, 용서하지 않겠다"며 직설화법으로 말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이 영화가 논쟁적이라면, 아마도 이 장면이 그 초점일 것 같다.

상업적인 계산이 정교하지 않은 점을 탓한다면 몰라도, 무서울 정도로 뚜렷한 이 영화의 메시지 자체는 거부하기 힘들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범인은 처음부터 피해자 부모에게 카폰 달린 차량을 마련시킬 만큼 지능적인 악(惡)이다. 얄밉도록 차분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십 통의 전화 목소리는 철저히 부모들을 농락한다. 아이는 44일 만에 시체로 발견된다. 그 사이 생지옥을 경험하는 부모의 심경이 영화의 핵심이다. 아이의 극중 이름은 상우. 엄마(김남주)는 아들의 비만을 걱정하는 중산층 주부로, 아빠(설경구)는 9시 뉴스의 메인앵커로 승승장구하는 기자로 설정됐다. 두 배우의 열연은 부모의 고통을 관객이 함께 겪는 듯한 체험을 안겨준다. 22일 시사회 직후 박진표(41) 감독을 만났다.

-마지막 장면을 처리한 방식이 충격적이다. 영화가 세상을 향해 직설법으로 말한다.

"그 장면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영화 전체가 그 장면을 향해 달려간다. 작위적이라는 지적도 있던데, 그건 보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다. 논리와 철학을 떠나서, 가슴 깊은 데 있는 말을 단순무식하게 하고 싶었다. 그 말이 제작진과 배우들의 마음이기도 하고."

-가장 영화로 다루고 싶었던 얘기라는 말로 들린다.

"발생 1년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해당 사건을 다룰 때 조연출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분노한 것을 '우리'의 기억과 분노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얘기다. 하지만 만들기가 쉽지 않은 얘기고, 신인 감독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괴를 계기로 가족의 갈등이 불거져 나오는 전개도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부모의 처절한 심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할 뿐, 가족사로 곁가지를 치지 않는다.

"그런 일을 겪으면 가족이 해체될 거라는 시각이 편견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44일간 범인에게 끌려다니는 데 급급해 그럴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부모의 절박한 마음을 훼손시키지 말자는 게 내가 세운 원칙 중 하나다. 이렇게 하면 좀 더 무서울 텐데, 슬플 텐데, 잘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하면서도 그걸 억누르려고 했다. 그게 내 초심이었다."

-다른 원칙은 뭐였나.

"첫째, 납치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 둘째, 범인의 행적 중에 밝혀지지 않은 내용을 쓰지 말자였다. 실제로 어땠는지 모르는데 상상해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예쁜 아이를 캐스팅해 고생하는 것 보여줘서 불쌍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설경구.김남주의 몰입이 대단하다. 촬영현장에서는 배우들에게 연기 주문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다던데. 사건에 대한 별도의 자료를 배우들이 접했나.

"내가 '이 상황에서 (부모들이) 밥을 먹었을까'하면 (배우들이) 굶고 왔고, '잠을 잤을까' 하면 밤을 새고 왔다. 좋은 배우들 덕분이다. 이들에게 단지 '연기를 잘했다'고 하면 오히려 욕이 될 것 같다. 마치 테크닉을 발휘했다는 말 같아서. 정말 부모처럼 연기했다. 시나리오 끝에 범인의 몽타주가 붙어 있었다. 다른 자료는 없었다. 범인의 목소리를 처음에 함께 들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로 만든 이유는.

"나만의 기억으로 묻어둘 거냐, 아니면 상업영화라는 틀을 빌려 우리 사회 많은 사람이 잊고 있던 정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냐, 결국 '현상수배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어쩌면 마지막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내가 영화감독이니까 영화로 한 것이고, 방송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방송으로, 소설가였다면 소설로 했을 것이다."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에 이어 이번 세 번째 영화까지 모두 실화가 소재다. 다큐멘터리 PD 시절의 경험이 남다른 자산으로 보인다. 방송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영화를 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너 왜 자꾸 실화하냐, 이러면 달리 할 말이 없다. 허구를 못 만들어내서다. 다른 감독들의 상상력이 부럽다. 내공이 쌓이고 상상력이 풍부해지면 정말로 다른 얘기를 해보고 싶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나름대로 사명감도 갖고, 공명심도 좇으며 살았다. 그런데 특히 시사다큐멘터리를 하다 보면 너무 안 좋은 것만 보게 된다. 영화라면 내가 살고 싶은 세상, 보고 싶은 세상을 결론에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와 실화의 관계, 영화와 세상의 관계 맺음에 대해 이 영화의 방식이 논쟁이 되지 않을까.

"영화가 뭐다, 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내 개인적인 실험이자, 조금 더 욕심내면 우리 사회의 실험이다.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는 영상물이 영화일 수 있을까, 라는."

글=이후남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