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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가 하려 했을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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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두어 시간 줄달음으로 읽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왜 문제가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싸한 감동에 코끝이 찡할 뿐이다. 공연히 죄스럽다. 왜 이럴까. 분노해야 한다는데….

'요코 이야기'는 일제시대 북한 지역에 살던 열두 살 일본 소녀가 본 전쟁 참상의 기록이다. 1945년 7월 29일 요코가 어머니.언니와 함께 함경북도 나남(청진)을 탈출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전반부는 간신히 피난 열차에 오른 세 모녀가 서울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동안 겪었던 긴장과 공포를, 후반부는 일본에 도착한 뒤 동포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냉대를 꿋꿋하게 이겨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의 성폭행 부분은 두어 번 나오는데 모두 짧고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조선 남자들 몇 명이 여자들을 숲으로 끌고 갔는데 '살려 달라'는 일본말이 들려왔다"는 식이다. 이 대목들을 읽고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을 모욕한다고 분개한다면 지나친 피해의식의 발로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저 전쟁과 그것이 초래한 혼란과 폭력.광기에 노출된 여성들이 느껴야 했던 공포라는 게 더 가까울 터다. 당시 그런 두려움을 느꼈던 한국 여성이 왜 없었겠느냐는 말이다.

이 책은 반한(反韓)이 아닌 반전(反戰)소설이다. 갓난아이의 시체를 열차 밖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추위를 이기려고 죽은 군인의 옷을 벗겨 입으며 굶주림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는 등 전쟁이 강요한 생존의 고통이 소설의 주제다. 일본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한 것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 때문이다. 요코의 어머니는 입대하겠다는 오빠에게 이렇게 외친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려고 진주만을 공격한 건 하나도 잘한 짓이 아니야. (…) 남편이나 아들을 잃느니 차라리 우리나라가 지는 걸 보는 편이 낫겠다."

자신을 '누더기 인형'이라고 놀렸던 사가노 여학교 급우들도 저자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다. 오히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선 여기저기서 애정이 엿보인다. 특히 뒤처진 오빠의 목숨을 구해주고 친자식처럼 대해 줬던 한국인 가족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넘친다.

이번 파문의 진앙은 미국이다. 아무리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해도 이 소설이 미국에서 중학교 교재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시아 식민지 역사에 무지한 미국 학생들에게 일본이 자칫 전쟁의 피해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교포들의 반발은 그래서 정당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한국에서도 출판되지 말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오히려 이제는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등식의 민족주의적 집단 주술(呪術)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왜 일본하고 축구를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하고 일본이 잘나가면 왜 우리 배가 아파야 하느냔 말이다. 문제는 '요코 이야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 '민족' 개념이다. 근대의 삭풍 속에서 우리 생존의 맹아를 지킨 건 틀림없이 강한 민족주의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1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민족 개념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공존하며 국민을 넘어 세계 시민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런 소설쯤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