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 성대운구에 유림 “발칵”/또다른 불씨 남긴 장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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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유림측과 논쟁 벌이다 옆문으로/학생들 “합의통과” 주장… 논란일듯
성균관대생 고 김귀정양의 유해가 11일 편법으로 성대구내에 운구된데 대해 유림들이 『성균관 6백년 역사상 없던 일』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어 장례이후의 또다른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림측은 『시신이 돌아들어가도 좋다고 합의하지 않았다』는 주장이고,학생들은 『합의를 얻어 행동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상반된 입장.
서울 백병원을 떠난 김양의 운구가 성대에 도착한 것은 11일 오후 5시15분쯤.
이에 앞서 유림 50여명은 오후 1시부터 교문앞에서 운구를 저지하기 위해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충돌을 막기위해 이중기 성균관총무처장·장을병 총장,장기표 대책위집행위원장·지선스님 등이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교문앞에서 기동욱 총학생장등이 농성중이던 강주진 성균관이사장 등에게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오후 6시쯤 총학생장 기군이 『위패가 모셔진 사당을 통과하지 않고 후문을 통하거나 돌아서 벽을 헐고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강이사장등 앞쪽에 있던 유림들은 『돌아서 가는 것은 총장과 협의하라』고 답변했다.
기군은 곧바로 유림회관으로 가 장총장에게 『허락을 얻어냈다』고 전달,장총장이 교문앞으로 와 유림들에게 『돌아서 들어가면 반대 안하시느냐』고 물었고 유림들로부터의 반대의사 표시는 없었다.
장총장은 『나중에 저에게 책임을 미루시면 안된다』는 말을 두번 반복한뒤 총장실로 되돌아 갔고 총학생장 기군은 학생들에게 『합의가 이뤄졌다』며 운구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최창학 청년유림회 중앙회장이 나타나 『귀정이가 정문으로 다녔지 담을 깨고 다녔느냐』며 반발하자 다른 유림들도 『뒤책임을 질 수 없다』며 동요했다.
학생들은 그사이 운구행렬을 움직여 오후 6시45분쯤 학생회관옆 조그마한 문을 통해 김양의 관을 교내로 들여왔고 나머지 학생 2천여명은 정문을 통해 학교안으로 모였다.
이에 대해 최청년유림중앙회장과 김복출 유도회사무총장은 오후 7시30분쯤 기자회견을 갖고 『유림은 시신의 학교진입을 허용한 적이 없으며 김경수 성균관장이 퇴원하면 전국유림대표회의를 갖고 대응책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유림은 공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일상생활에서 이를 실현하는 「선비」들을 일컫는 말로 현재 유림조직은 총괄체인 서울 성균관을 중심으로 전국 2백32개소의 향교와 도·군·면별로 2백57개의 유도회 조직이 구성돼 있다. 전체 유림은 활동하지 않는 숫자까지 합치면 1천만명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양 시신운구처럼 명분과 관계된 일에는 강한 응집력을 보이고 더 많은 유림들이 동참할 가능성도 크다.
1398년 왕립 학술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은 조선조 5백년동안 지조높은 선비와 학자,왕조가 필요로하는 관료들을 수없이 배출해 낸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 명맥이 끊겼다가 해방이후 전국의 유림들이 기금을 모아 유림들이 재단이 되는 성균관대를 출범시켰다.
60년대들어 유림들은 학교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국향교의 총괄조직인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됐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성대와 유림의 총본산인 성균관은 별개이지만 성대의 본체가 성균관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유대관계가 확고하고 성대캠퍼스안에 유림회관과 성대전 등이 있기 때문에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장을병 성대총장이 『학생들이 유림의 뜻을 무시한채 운구를 강행하면 사퇴하겠다』고 밝혔던 것도 이같은 배경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운구행렬이 성대전앞을 지나지 않았고 자꾸 문제를 삼아봐야 양측 모두 득보다 실이 크며 학생들을 제재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현실론을 제시하며 양측을 무마하고 있어 김양 운구시비가 얼마나 번질지는 미지수라 할 수 있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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