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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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처럼 「국민」이라는 말이 값싸게 남용되는 경우도 드물다. 정치인들은 입만 벙긋하면 국민을 찾는다. 정작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누구보다 국민을 위하는 체 하는 모양은 우스워만 보인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찾는 국민은 그나마 국민을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니 듣기 나름으론 괜찮을 수도 있다. 그들은 겉치레라도 국민이라는 말앞에 친애한다느니,사랑한다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걸핏하면 「국민」을 찾는 또하나의 집단이 있다. 무슨 「대책회의」라는데서 주관하는 「범국민대회」 또는 「국민대회」가 그것이다.
지난 토요일에도 전국 17개 지역 86개 시·군에서 「제5차 국민대회」를 열려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못열고 말았다.
어느 단체나 적어도 국민대회를 열려면 그 바탕엔 국민다수의 묵시적 동조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도 없이 「국민대회」운운하면 진짜 국민들의 웃음과 핀잔을 사기 십상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이나 우리의 4·19,또는 가까이 87년의 6·10 항쟁쯤 된다면 국민대회라고 해도 대다수 국민은 심정적으로 동참하고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난데없이 「범국민대회」를 열고,정권타도를 외치며,대로와 공공건물을 점령하고,마구잡이로 화염병을 던지고,안하무인으로 시민의 고통과 불평을 강요하는 행위는 과연 진짜 국민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어느 정권이 이뻐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따져보면 지금 정권처럼 국민의 인기도,신망도 없는 정권도 보기 드물다. 그러나 이 정권은 진짜 국민이 헌법에 따라 세웠다. 그것을 부정하려면 헌법을 엎는 수 밖에 없다.
지금 그런 범국민대회를 바라는 진짜 국민들이 몇이나 될까.
그 대답은 요즘 재야 범국민대책회의가 주관한 「국민대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 냉소와 항의와 격렬한 거부반응을 우리는 며칠전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볼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되면 재야단체들이나 좌경세력들은 「범국민대회」나 「국민대회」라는 말대신 그 대회를 꾸민 쪽의 명칭을 따서 차라리 「재야대회」나 「좌경운동권대회」라는 편이 걸맞는다. 그래야 진짜 국민들도 헷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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