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급변 사태 대비한 시나리오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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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한 계획이 있다."

왕지쓰(王緝思.사진)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 원장은 1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 50주년 기념 초청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 중 한 명인 그는 이날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와 함께 패널로 참석했다.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해 중국은 준비돼 있는가"라는 김 대기자의 질문에 그는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북한 핵실험 이후 중국이 보여 준 대북 비난 성명과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의 미국.러시아 방문 외교 등이 이런 계획의 존재를 알려 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조치는 과거엔 없던 일로 중국 정부가 이미 준비한 계획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재로선 중국과 미국이 '빅딜'을 할 가능성은 없다"면서도 "아직 시기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말해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음은 이날 강연에 앞서 17일 중앙일보와 한 단독 인터뷰 내용.

-지난해 중국 CC-TV는 15세기 이래 9개 강대국의 흥망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起)'를 방영해 주목받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얻은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각국이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장점을 잘 살려 강대국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중국처럼 큰 나라가 30년 가까이 고속 성장을 거듭한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중국은 특히 이념과 체제가 달라 미국의 우려를 산다."

-타임은 최신호에서 21세기를 '중국의 세기'라고 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강조했다.

"이는 책임을 누구한테 지게 하느냐의 문제다. 미국이 말하는 국제사회는 미국 중심의 사회가 아닌가. 중국은 세계 평화와 발전, 공정이라는 나름대로의 잣대를 갖고 행동한다."

-강대한 중국은 이웃 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겠는가.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한국인의 의구심은 크다.

"동북공정은 일부 학자의 연구일 뿐이다. 100명의 중국인 중 동북공정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 될까 말까다."

-그러나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아닌가.

"정치가들은 여러 곳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정치가 자신들도 견해가 있다. 현명하게 판단할 것이다."

-북한 핵실험 여파가 크다. 미국이 북한을 이라크처럼 선제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럴 힘은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라크 전쟁 당시엔 영국과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북 선제 공격을 지지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은 북한에 양보도 하지 않겠지만 무력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대북 정책을 핵의 비확산으로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존할 것으로 보는가.

"일본은 방위력 증강을 꾀할 것이지만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핵 개발은 북한이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중국을 포함해 세계가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핵과 관련해 중국에 거는 기대가 크다. 북한이 핵실험까지 한 마당에 중국이 대화를 통한 해결만 주장하는 건 너무 안이한 게 아닌가.

"북한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에 해당한다. 중국으로선 신중할 수밖에 없다. 중국 입장에선 한국 및 국제사회와의 공조가 중요하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제재를 한다고 해서 기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중국이 미국의 제재에 동참하면 한국도 동참할 것인지 묻고 싶다. 아무도 북한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누가 북한을 설득할 것인가. 여기에 중국의 독특한 역할이 있다."

-지난해 연말 6자회담이 재개됐지만 성과가 없었다. 6자회담은 실패했는가. 향후 북핵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6자회담이 큰 좌절을 겪고 있지만 실패한 건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6자회담은 지속돼야 한다. 미국은 북한 정권의 교체를 바란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은 북한이 정치적으로 유연해지기를 원한다.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북한에 대한 설득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북핵 문제는 한동안 현 상태가 유지될 것으로 본다."

-세계는 '미국이란 초강대국과 여러 강대국이 공존'하는 형세다.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지위는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 보는가.

"세계 곳곳에 반미 정서가 확산되는 등 미국의 소프트 파워가 하락 추세다. 이것이 향후 20~30년 동안 계속 미국의 종합 국력을 끌어내릴 것이다."

-중국의 국력이 언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보는가.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30분의 1에 불과하다. 워낙 격차가 커 언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말할 형편이 아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 중.미는 누가 더 상대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중국인은 자신들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일반인의 경우 중국이 미국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 그룹에선 미국이 앞선다. 중국에서 나오는 미국 연구 서적에 비해 미국에서 나오는 중국 연구 서적이 훨씬 더 많다."

-장쩌민(江澤民) 시대의 외교는 천안문(天安門) 사태 이후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있었다. 후진타오 시대의 대미 외교 중점은 무엇인가.

"신뢰를 증가시키고, 의혹은 감소시키는 것이다. 미국과의 전략적인 협력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부문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의회와의 협력 강화, 군사 교류 확대 등이 그 예다."

-여성으로서 미국 의회 사상 첫 하원의장이 된 낸시 펠로시는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향후 중.미 관계 전망은.

"천안문 사태 당시의 기억을 갖고 현재의 중국을 보면 안 된다. 중국은 많이 변했다. 펠로시의 견해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란다. 향후 중.미 관계는 '상호 견제와 상호 의존'이 반복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이다."

◆왕지쓰=1948년 출생. 유명 언어학자였던 아버지 왕리(王力)가 문혁 때 '반동학벌(反動學閥)'로 몰리는 바람에 네이멍구로 추방돼 9년간 노동을 해야만 했다. 30세에 베이징 대학에 입학해 국제정치학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다. 중국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소장과 중앙당교 전략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부터는 첸치천(錢其琛) 전 부총리의 뒤를 이어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 원장으로 있다. '백악관의 심장을 파고든 중국 나그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인터뷰=유상철 기자<scyou@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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