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 최후 보루가 공격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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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우 판사

'현직 판사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법조계는 "사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행위"라며 큰 충격에 빠졌다. "판결에 대한 승복 분위기마저 무너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대법원의 한 판사는 "사법부의 권위가 무너진 결과"라며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풍토를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이제까지 피습이나 테러 등에서 판사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신변 안전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재판은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어 한쪽은 불만이 있기 마련"이라며 "그게 무섭다고 판결을 달리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중앙지법의 또 다른 판사는 "테러 행위자가 대학교수까지 한 사람인데, 판결이 억울하다며 소송 당사자들이 이번 사건에 영향을 받아 모방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상명 총장을 비롯한 검찰도 경악하는 분위기였다. 대검의 한 간부는 "법치국가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테러를 당한 셈"이라며 "사법부는 국민 권리의 최후 보루인데 사법부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느냐"고 개탄했다.

일각에서는 최근의 법조 비리 사건으로 법원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신현호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면서도 "최근 법조계 권위가 무너진 일련의 사건들에 비춰볼 때 예견됐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가 15일 서울고법 박홍우 부장판사 테러 때 사용된 석궁을 보여 주고 있다. 범행을 저지른 김명호씨(사진 뒤편 오른쪽)의 모습이 철창 너머로 보인다. [연합뉴스]

◆"전직 대학교수가 어떻게…"=연세대 법대 김종철 교수는 "지성인이라는 전직 교수가 개인 감정을 갖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 무력으로 보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사법부는 이번 일에 굴하지 말고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홍주 변호사도 "대학교수까지 지낸 사람이 어떤 억울함이 있다 해도 흉기로 판사에게 위격을 가한 것은 가위 충격적"이라며 "사법부의 권위를 재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테러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김씨의 테러를 비난했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김씨의 행동을 옹호하는 의견도 적지 않아 우리 사회가 사법부를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네티즌 '87jing'는 "명색이 전직 교수라는 사람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상해하다니 말도 안 된다. 사법권에 대한 도전이며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cucu_47'은 "석궁은 중세 때 교황청에서 금지령까지 내린 살인무기"라고 밝혔다. 또 다른 네티즌(vivatest)은 "학자가 양심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은 서민보다 많다. 석궁으로 양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양심이 아니라 온전히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판결 불만 난동 늘어=소송 당사자들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늘어나는 추세다. 1997년 8월 판결에 불만을 품은 강모씨가 수원지법 성남지원장실에 난입해 지원장의 팔 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당시 충격을 받은 지원장은 법복을 벗었다.

2004년 부산지법에서는 판결에 반발해 40대 여성이 판사실을 찾아가 여판사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는가 하면 이듬해 6월에도 부산지법 판사실에 40대 남성이 찾아가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있었다.

대법원은 2005년 서울 소재 법원에서 피고인인 남편이 증인 선서를 하는 부인을 흉기로 찔러 중태에 빠뜨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법정경위와 청원경찰.방호원.공익근무요원으로 구성된 경비관리대를 설치했다. 그러나 판사실이나 퇴근길 등 법정 밖에서 일어나는 테러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민동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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