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발언에 대선주자 긴급상황 관리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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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대선주자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1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우리 시대의 얼굴’ 그림전에 등장한 대권주자들. 이 그림들은 이광춘 경기대 교수가 그렸다. 왼쪽부터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고건 전 총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연합뉴스]

"참 나쁜 대통령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9일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 소식을 듣자마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멘트를 날렸다. 여성적 감수성이 묻어난 감성과 직관의 언어다. 이 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노 대통령이 10일 박 전 대표의 멘트를 다시 거론해 반박할 정도였다. 박 전 대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노 대통령이 9일 오전 11시30분 국민 담화를 발표한 지 30분 만에 나왔다. 캠프 관계자가 노 대통령의 담화 소식을 전하자 사무실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마친 박 전 대표가 바로 반응한 것이다. 민감한 이슈였지만 참모들과 회의 절차 같은 건 없었다. 박 전 대표의 직관적인 감성 멘트는 테러 사건으로 수술에서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물은 데서도 드러났다. 이 첫 반응으로 5.31 지방선거의 대전 판세를 뒤집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정국의 고비를 가르는 주요한 상황에서 주변보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나 사학법 재개정 투쟁은 초기에 주변 참모들의 우려가 많았으나 '나 홀로 선택'을 고집해 관철시킨 경우다.

급박한 상황에서 대선 주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대선 주자들의 반응과 멘트는 나름대로 '위기관리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만의 고유한 색깔과 체취가 녹아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노 대통령의 발표 전에 개인 정보망을 통해 담화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발생하자 참모 회의가 즉각 소집됐고, 거의 동시에 법학 교수들로 구성된 해당 분야 자문회의도 소집됐다. 이 전 시장은 한 시간가량 자문회의 자리에 있었다. 참모회의의 정무적 판단과 자문회의의 전문적 조언을 기초로 "경제 살리기에 힘써야 하는데 웬 개헌이냐"는 반응을 내놨다. 어떤 위기가 발생해도 자기의 강점인 '경제'로 연결시키는 최고경영자(CEO)형 명쾌함이 돋보였다는 평이다. 법학 교수들과의 만남에선 "노 대통령이 주장한 대선과 국회의원의 동시 선거는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생략하는 위험이 있다"는 논리를 숙지했다.

이런 논리는 당일 논평에선 내놓지 않았지만 이튿날인 10일 공방이 확산되면서 이 전 시장의 추가적인 논리로 제시됐다. 처음부터 상황 파악을 전면적으로 치밀하게 한 뒤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한 것만 곶감 빼듯 내놓는 노련함이 있다. 이 전 시장 측은 체험과 프로그램, 콘텐트에 강한 그의 면모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건 전 총리는 참모회의가 올린 세 종류의 반응 모델을 기초로 홀로 판단했다고 한다. 서울 연지동 개인 사무실에서 숙고하며 언론 보도자료를 다듬었는데 "기존의 입장과 기조에 변함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전례와 일관성, 신중함이 몸에 밴 행정형 위기관리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노 대통령의 발표 때 설악산 산사의 법회에 있었다. 즉각 반응하기도 어려웠지만 서울의 참모들끼리 일단 먼저 회의를 했다. 손 전 지사의 재가를 거쳐 4시간30분 만에 나온 첫 반응은 "일자리 하나라도 더 만들라"는 교과서적 멘트였다. 그러나 3시간 있다가 나온 추가 반응은 "오얏나무 아래선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죠?"라는 비유적 멘트였다. 대학 교수 출신인 손 전 지사가 대중형 지도자로 변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부지불식간 드러났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평소 간결하고 호소력 있는 달변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 반응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참모들과의 회의도 거쳤다고 한다. "개헌은 중장기적으로 큰 경제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노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이고 강력한 찬성 표현은 아니었다. 주변에선 노 대통령이 조성한 개헌 정국이 그가 추진하는 통합신당 정국을 삼켜버리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했다. 목표의식에 투철한 전략적인 측면이 엿보인다.

김근태 의장은 주자들 중 가장 빠른 반응을 내놨다. 노 대통령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개헌을 망설이는 것은 당리당략"이라고 대통령을 적극 변호했다. 통합신당 문제에선 노 대통령과 다른 입장이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은 이것저것 눈치보지 않고 발언하는 신념형이다. 재야 운동의 인생 역정이 묻어난다. 근엄성이 강한 '교장 선생님형' 언어 습관 때문에 재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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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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