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환자 보낼 땐 너무 가슴 아파 그날은 제발 비번이길 …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울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의 허수진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간암 말기 환자인 이모(60.여)씨가 허씨의 손을 잡고 ‘여기는 참 편해. 고마워요, 고마워’라고 되뇌고 있다. [사진=안성식 기자]

1일 오전 3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의 이마누엘방(임종실).

췌장암 말기 환자인 A씨(56)는 부인과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이미 12시간 전부터 혈압이 내리고 숨이 가빠오는 등 죽음의 징후가 보여 4인실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넉 달 전 의료진은 더 이상의 항암 치료는 소용이 없다고 판정했다. 이후 그는 호스피스센터에서 통증 조절 치료만 받으며 입.퇴원을 반복하던 끝에 이곳에서 숨을 놓았다.

죽음은 휴일도, 연말연시도 가리지 않는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들을 돕는 곳인 호스피스센터도 마찬가지다. 3일 만난 간호사 허수진(36.여)씨도 연말연시를 말기 암환자들과 보냈다.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가족들도 함께한다. "환자들과 가족들은 해야 할 말도, 풀어야 할 것도 많아요. 하루하루가 워낙 소중한 분들이잖아요."

그는 지난해 12월 24일과 31일 야근을 했다. 밤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16명의 환자를 돌본다.

"여기 환자들은 오래 병치레를 하신 분들이라 고통이 와도 가족들이 잠에서 깰까봐 참고 계시기도 해요. 그래서 밤엔 더 자주 돌아봐야 해요."

30대의 젊은 사람이 죽음 가까이서 일하는 건 흔치 않다. "죽음 앞에선 사람들이 너그러워져요. 모든 걸 용서하고 싶어하시죠. 그 앞에서 제가 더 많이 배웁니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내 마지막은 이랬으면 좋겠다'하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되죠."

임종실엔 가족들만 들어간다. 혈압 올리는 약도 쓰지 않고, 인공호흡도 하지 않는다. 의료진은 간간이 도움이 필요한지 방안을 들여다본다.

허씨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감각은 청각이랍니다. 임종실의 가족들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등 충분히 감정 표현을 하시라고 조언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위에서 "간호사가 되면 참 잘할 것 같다"는 말에 간호대학에 진학한 허씨는 1997년 강남성모병원에서 근무를 시작, 5년간 소화기계 내과에 있었다. 말기 암 환자들이 고통을 겪으며 힘들게 임종을 기다리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허씨는 이들에게 뭔가 도움을 줘야겠다는 심정에서 2002년 호스피스센터에 지원했다. 지난해부턴 가톨릭대 임상간호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호스피스학을 전공하고 있다.

"의료진 사이에서도 '죽어가는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존엄성을 유지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호스피스센터의 방식이 좋습니다."

병원의 이런저런 치료에 지친 말기 환자 중에는 이제 조용히 훌훌 털고, 나누며 가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편안하게 해줘 고맙습니다" "정말 사람 대접 받은 것 같아요"라는 환자들의 감사 표시가 고맙고 뿌듯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죽음에 담담해야 할 허씨지만 어린 환자나 어린아이들을 둔 환자를 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이 가까워져 오면 '그날은 내가 비번이면 좋겠다'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한다.

허씨는 가족, 특히 엄마를 이해해주는 어린 두 딸(8세.6세)이 고맙다. 어린이날이나 설날같이 남들이 쉬는 날 엄마가 출근해 놀아줄 수 없다는 것도 먼저 헤아린다. 그는 딸들이 대견하면서도 일찍 철들게 하는 건 아닌지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정신없이 연말을 보낸 허씨는 "새해 계획도 못 세웠어요. 호스피스센터가 더 늘어나 환자와 가족들이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새해 소망을 밝혔다.

글=권근영 기자<young@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호스피스(hospice)=말기 환자가 편안하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돌보는 간호를 이르는 말. 호스피스센터.호스피스병동.호스피스간호사 등의 용어로 쓰인다. 호스피스센터에선 치료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들이 통증 완화 등 기본적 치료만 받으며 사별을 준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