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만화골목|진술린 현대인의『공상』을 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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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공포의 외인구단」「신의 아들」「카멜레온의 시」「악마의 성전」「아마겟돈」등 대본소용 만화들이 여남은평 점포안팎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까치와 엄지·최강타·이강토·독대·달호·독고탁 등 유명 만화의 쟁쟁한 주인공들이 책마다 특유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하철 종로5가역에서 동대문 쪽 30m지점에 위치한 골목길은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의 만화가게 및 해외에까지 만화를 공급하는 만화도매상 거리.
골목길 양편에는 10여 개 도매점들이 진을 치고 있다.
현재 활동중인 국내 만화작가는 3백여 명.
이들이 그려내는 연간 3천∼4천여 종의 대본소용 만화는 일단 이곳에도 빠짐없이 들어와 소매점으로 팔려 나간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라곤 별로 없어요. 단지 만화의 주인공들이 바뀌었을 뿐이지….』
68년 이 골목 귀퉁이에 제주서점을 차린 후 20여 년 간 이곳을 지켜 온 백도범씨(58).
6·25전쟁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군화·청바지 등 이 많이 달러 청바지 골목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만화·군복이 아직도 뒤섞여 있어 묘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아무리 비디오시대라 해도 만화는 나름대로 독자를 갖고 있어요』
15년 동안 만화 도매업에 종사해 온 제일서점의 김형렬씨(45).
『학생들 사이에선 요즘도 유명만학의 줄거리를 모르면 대학에 끼지 못할 정도라고요.』
실제로 지난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일본만화 복제본인「드래곤볼」의 경우 강남의 중-고생 중 80%정도가 탐독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하루 평균 이곳으로 들어오는 신간만화는 10여종.
15개 가량의 만화출판사에서 거의 매일 대본용 만화 1편씩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도매상은 출판사와 연결된 4개의 총판으로부터 권당1천7백원에 신간을 구입, 1백원의 이윤을 붙여 대본 소에 팔고 있다.
1백∼6백원에 들여오는 구간도 한 권을 팔면 마찬가지로 1백원이 남는다.
『만화가게를 그만두거나 신설하려는 업소들 대부분은 여기에 만화를 되팔거나 대량 구입해 가지.』
「할머니네」로 통하는 신진서점의 안은순씨(62).
20여 년간 만화도매업으로 6남매를 키워 온 안씨는『이제는 그만두시라』는 자식들의 권유에도 쉽게 손을 놓을 수는 없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곳의 도매상들은 미국·일본·브라질 등 해외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도 만화를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포사회에서도 만화 붐은 여전해 주문이 쇄도, 날개돋힌 듯이 팔린다는 것.
만화가게가 성인들의 독서실(?)이 되기 시작한 것은83년「공포의 외인구단」이 출간된 이후부터다 만화가 어린이들의 것이란 통념을 깨뜨리고 기업만화·성인극화·스포츠만화 등 이 대학생·직장인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져 나간 것.
『그때는 정말 신이 났어요. 책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난해 만화 대본 소의 영업시간이 오후9시까지로 제한되고 임대료가 폭등, 1만여 곳에 이르던 대본 소가 3천 개로 줄면서 만화 도매상에도 불황이 닥쳐왔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만화 도매점이 은행·한의원·음식점 등으로 간판을 바꾸면서 20여 곳의 점포가운데 절반이 문을 닫은 것.
점포마다 「만화가게 신설문의 대환영」이란 안내광고를 붙여 놓고 또다시 만화의 황금기가 도래하길 기다리고 있다.
『역 주변 등 일부 만화가게가 퇴폐와 청소년 타락의 온상으로 비춰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화를 읽는 것은 역시 즐거운 오락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일 만화 점 김씨는『일부 기성세대의 퇴폐풍조가 퇴폐만화와 변태영업을 조장시켜 왔다』며『기성세대의 각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본 소 독자층의 70%이상이 20대 이상임을 감안할 때 지나친 사전심의로 이들 독자들이 만화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상인들은 입을 모았다.
까치와 엄지가 둥지를 틀고 사는 만화방 골목은 현실에 짓눌린 현대인들을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목이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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