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각목대회」에 깊숙이 개입|소석 쪽 편들며 YS 고사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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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7면에서 계속>
차 실장은 YS하고는 대화·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10대 유정회 의원이었던 K씨는 이런 증언을 했다.
『당시 정계엔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여야의원으로 구성된 육문회 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일종의 친목서클인데 지금도 있어요.
육문회 소속의 YS가 신민당총재가 돼 정국이 딱딱해지자 공화·유정의 육문회 소장파의원 몇몇이 박 대통령과 YS간의 영수회담을 만들어 보려고 은밀히 뛰었지요. 청와대의 유혁인 정무수석도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라 감이 통했고 YS족에는 육문회는 아니지만 측근중의 측근인 김동영·최형우 의원이 접촉창구였죠.

<비밀접촉 새 나가>
박 대통령 쪽도 특별한 거부반응이 없는 것 같았고 YS측도 피동적이지만「싫다」고는 안 했어요. YS도 마음 한구석에는「박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싸여 있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요.
일이 되겠다 싶어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며 양쪽에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데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YS 캠프 쪽과 접촉한 다음엔 어김없이 국회 로비에 소문이 돌아 버려요. 누가 낌새를 챘나 추적해 보면 여지없이 차 실장과 가까운 사람들이에요. 전화 도청을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귀신 곡할 노릇이었죠. 일이 이렇게 새나 가니 선 명에 신경 쓰는 YS폭이「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 밖 에요. 그러다가 YH사건이 터져 영영 대화는 물 건너 가 버렸지요.』
공화당의 박준규 의장·신형식 사무총장·오유방 대변인 등 당직자들은 야당당수를 의사당에서 내쫓아야 하는 원시적인 사태를 놓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민했다고 한다. 박 의장은 같은 뉴욕타임스 인터뷰기사에서 김 총재에 대해『김씨는 자고 깨면 매일 좀더 강한 혁명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고 힐난하고 YS제명 작전이 시작되자『진군의 나팔이 울렸다』 고 했지만 내심으론 자괴지심 비슷한 감정에 빠졌었다는 얘기다.
청와대의 핵심 참모였던 Q씨는『박 의장은 박 대통령이나 차 실장을 만나기만 하면 특유의 억양으로「아이구 이 일을 우 야지, 우에 해야 되노」라며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오유방 전 대변인(현 민자당 의원)은『YS제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잊고 싶은 기억중의 하나』라고 털어놓았다.

<김 총재 발목 다쳐>
YS에 대한 거실장의 불쾌감은 뿌리가 꽤나 깊었던 것 같다. 74년 8·15 육영수 여사 피살 닷새 후인 20일 경호 실에 입성한 차 실장은 사흘후인 23일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YS가「유신 철폐」를 외치며 당권을 쥐자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차 실장 측근이었던 Q씨는『6, 7, 8, 9대 국회를 같이 하면서 공수 단 대위 출신으로 일사란을 좋아했던 차 의원은 시끄러운 민간인 김영삼 의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며 『그런 판에 YS가 제1야당 당수를 맡았으니 눈초리가 고 울리 없었다』고 해석했다.
차 실장은 79년 5·30 공작에서 YS를 꺾으려다 실패했지만 이보다 앞서 76년5월 신민당전당 대회에서도 YS를 눌러 버리려 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작이 주효했는지는 몰라도 YS는 총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76년5월 대화는 우리 야당 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이었다. 대회 당일인 25일 새벽 주류·비주류당원 4백여 명은 대회장인 구 시민회관 별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장악하기 위해 각목·깨진 사이다 병·쇠망치를 휘두르며 난투극을 벌였다.
이 난동으로 김 총재 계열의 주류는 관훈동 당사에서, 이철승씨 중심의 비주류는 시민회관별관에서 각각 전당대회를 갖는 소극이 벌어졌다. 유명한「반당 대회」「각목대회」였다(4개월 후 열린 수습 전당대회에서 김 총재는 이씨에게 당권을 내주게 된다).
대회 3일전인 22일엔 비주류 청년당원 70여명이 폭력으로 관훈동 당사를 점령하는 바람에 김 총재는 총재실 뒤쪽 비상문을 통해 3m아래「안국 복국 집」슬레이트 지붕위로 뛰어내리다 발목을 다치는 등 혼이 나기도 했다.
이 웃지 못할 야당사태의 막후에 차 실장의 손길이 얼마만큼이나 닿아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몇몇 증언은 그가 반 김 작전에 깊숙이 끼어 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 내 깊숙한 곳에서 정국을 지켜보았던 Q씨는『야당 각목사건 뒤에 차 실장이 있었다는 뚜렷한 심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격동의 70년대에 중정 차장, 검찰총장, 내무·법무장관을 거친 김치열씨(현 제일생명 보험 고문)는『76년 5월 대회 때 차 실장 등 여권 핵심부는 김 총재를 배척하고 이철승씨를 감싸고돌았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내무장관이었던 나는 치안본부장 종로 서장에게 지시해 당사에 난입한 70여명을 모두 잡아넣었어요. 그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 한양 컨트리로 골프 치러 나갔는데 차 실장으로부터「각하가 찾으시니 빨리 들어 오라」는 무전연락이 왔어요.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차를 타고 가는데 카폰에서 불이 날 지경이에요. 구파 발에서 한번, 불광동에서 한번, 세검정에서 한번…. 차 실장은 전화로「왜 빨리 오지 않느냐」고 성화예요. 오전 11시쯤 들어가니 박 대통령과 신직수 정보부장·김정렴 비서실장, 그리고 차 실장이 모여 있더군요.

<청와대에서 호출>
차 실장이 대뜸「김 장관, 이철승씨 쪽 사람들을 70여명이나 잡아넣은 모양인데 좀 심한 것 아닙니까. 이씨 말을 들으면 자기 사람들도 시내 곳곳에서 김 총재 쪽 청년들에게 봉변 당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양쪽이 피장파장 아닙니까. 한쪽만 잡아넣으면 오해를 받으니 그런 점도 고려하는 게 어떻겠습니까」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이씨 쪽이 당한 증거를 대면 김 총재 사람들도 잡아넣어야지요. 잘못했다면 양쪽을 다 처벌해야지 피장파장이라고 당사 난입 자들을 풀어주면 꼴이 되겠습니까. 민주주의 한다는 나라에서 야당 총재가 폭력을 피하려고 2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했는데 이를 그대로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고 반박했죠. 대통령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더라고요. 국수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나를 쳐다보는 차 실장 얼굴에 불쾌하다는 눈치가 역력해요. 이때 나는 차 실장이 김 총재를 떨궈 내려고 이씨를 민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죠. 분위기가 이러니 차 실장이 각목 파동에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김 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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