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밥그릇 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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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밥그릇 경전’- 이덕규(1961∼ )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밥그릇 경전이라니, 밥이야말로 태고적부터의 가장 오랜 종교겠습니다. ‘밥교’라는! 불경스런 잡념까지 싹싹 핥아가며 밥 잘 비웠겠다, 빈 밥그릇 온몸으로 저리 맘껏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일없이 ‘밥그릇이나 씻으러 가야(洗鉢盂去)’겠습니다. 제 밥그릇 잘 비우고 제 밥그릇 잘 씻는 일이야말로 선(禪)의 경지입니다. 밥교의 제일교리겠지요. 개의 불성(佛性)이며 개의 평상심이 저러하거늘… <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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