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감각 못 맞춘 연출에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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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네X 코를 비틀고, 머리카락을 뽑아버리고, 귓구멍에 귀쑤시개를 콱 쑤셔 넣고….』
알프레드 자리의 1896년작인 『우부 대왕』(바탕골소극장·17일까지)에는 이와 같이 잔인하고 야만적인 대사들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이 작품은 현대의 실험극, 특히 부조리극이나 아르토의 잔혹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에서 연극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줄거리 자체는 참으로 황당무계하다. 얼간이인데다 겁장이에 지나지 않는 폴란드의 강군 우부가 교활한 아내의 꾐에 넘어가 왕을 시해하고 권좌에 오른다. 신하들을 무참히 살상하고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하며 권력과부를 마음껏 즐기다 저항세력에 몰려 결국 프랑스로 줄행랑치게 된다. 즉, 우부왕은 인간의 탐욕과 잔인성을 전형적으로 풍자화 한 인물이다.
이처럼 동화 같은 이야기가 「당시 연극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것은 우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어들이 등장함으로써 관객들로부터 큰 반발을 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는 저급한 언어의 사용을 통해 오히려 말의 모호성과 부조리 성을 드러내려 했고 전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몸짓, 유아적인 분위기의 무대장치, 가면, 신호나 플래카드 등 당대로서는 극히 초현실주의적인 기법들을 사용했다.
김철리 연출의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다양한 소도구들과 인형을 비롯한 오브제의 활용이 돋보였다. 사람이나 해골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단상이나 배로 이용되는 커다란 궤짝들, 옷걸이였다가 우부왕의 춤 상대가 되는 알몸의 마네킹, 옥좌로 사용되는 변기위에서의 뼈다귀 식사, 신하들의 숙청이나 전쟁과정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인형들, 우부왕의 장난감 말, 커다란 천에 그려진 농부의 짐, 꿈속에서 그림으로 나타나는 왕가의 선조들….
그로테스크한 의상과 분장 또한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 요소였다. 여러가지 색깔이 혼합된 가발과 현란한 수영복 차림에 엄청난 크기의 가슴을 달아 노출시킨 왕비, 꼭 끼는 흰색 타이즈에 남성이 강조되어있는 우부왕, 곡마단의 광대 같은 차림의 신하들, 거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는 짙은 분칠에 요란한 색조화장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 연극은 자리의 연극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시각적 볼거리를 강화하느라 애쓴 노력이 역력했다. 그러나 공연의 성과는 별로 혁명적이지 못했다. 그 일차적 원인은 우선 시대적인 감각이 크게 달라진 때문이다. 당대에는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던져진 대사 첫마디인 「에잇 X같은 것」이라는 말 때문에 공연이 15분이나 중단될 지경이었으나 우리는 이미 공연 속에 등장하는 욕설이나 외설에 지칠 만큼 익숙해져있다. 오늘의 관객들에게 그것이 쇼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러한 대사들이 터져 나오는 상황 자체를 더욱 기발하고 괴이하게 꾸며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시대의 관객들이 놀랄만한 최첨단 메커니즘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배우들의 몸짓과 발성이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도 문제였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어린아이들처럼 그저 천진스럽게 재미난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므로 배우들도 보다 유연하게 웃음을 유도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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