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7가] 박찬호가 '떨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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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박찬호에게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가 박찬호를 '떨이 세일'에 나선 것입니다.

최근 보스턴 언론에 따르면 보라스는 레드삭스와 일본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계약을 진통 끝에 성사시키면서 야릇한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보스턴의 응수를 타진한 것입니다.

미국 대륙을 동분서주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의 처지가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찜찜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즘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세일'에 나선 백화점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과거 행태를 더듬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보라스는 몇 년 전 다저스가 박찬호와 함께 쌍두마차 '영건'이었던 대런 드라이포트를 마무리로 기용하는 것을 검토하자 노발대발 난리 법석을 피웠습니다. 단장에게 공식 항의를 하고 언론을 통해서는 당시 데이비 잔슨 감독을 공개적으로 맹비난했습니다.

이유는 딴 데 없었습니다. 2~3년 정도만 선발로 더 뛰면 드라이포트가 FA(자유계약선수)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라스는 자신의 뜻대로 다저스의 기도를 무산시키고 드라이포트에게 대박도 안겨줬습니다.

보라스의 '마무리 제안'이 황당했기 때문일까요. 소식을 접한 박찬호의 매형이자 한국 대리인 격인 김만섭씨도 "그럴리가 없다"면서 펄쩍 뛰었습니다.

보라스가 박찬호를 '떨이 세일'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은 시장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선 박찬호는 여지껏 원매자가 나타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공식 통계업체인 엘리어스 스포츠뷰로로부터 내년 신인 드래프트 지명권 한 장을 받을 수 있는 'B급 FA선수'로 인정받았음에도 전혀 구단들의 입질이 없습니다.

그나마 원소속팀 샌디에이고가 연봉조정신청을 내고 단장이 "계약하고 싶은 투수 중 한명"이라고 했지만 다른 선수(데이빗 웰스)와 더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립 서비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라스는 올 스토브리그의 하일라이트인 좌완 투수 배리 지토의 계약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박찬호는 그저 '후순위' 고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끼워 팔기'하겠다는 보라스의 발상은 무엇보다도 야구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장삿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지탄받을만 합니다.

마무리 투수의 제일 요건은 삼진으로 타자를 솎아낼 수 있는 압도적인 구위가 우선입니다. 박찬호는 올시즌 136.2이닝을 던져 96탈삼진을 잡아내 이닝당 0.70개에 그쳤습니다. 통산 이닝당 0.86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구위가 하락세에 있는 것이 완연합니다. 홈런도 24경기서 20개를 맞았습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마무리로 3세이브를 거뒀지만 내용은 아슬아슬 했습니다.

마무리 투수의 또 하나 중요한 요건은 연투 능력인데 박찬호는 풀타임 첫 해인 96년을 제외하고 거의 선발로만 던졌고 마무리 경험은 전무합니다. 안좋은 허리는 텍사스 시절 참혹한 부진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이도 이제 34세가 됩니다.

박찬호가 어쩌다가 그 누구보다 마무리 투수의 특성과 불리함을 잘 알고 있을 에이전트에게 조차 빨리 처분해야 할 선수가 된 것인지 세월무상일 따름입니다.

USA 중앙일보 구자겸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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