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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미제 앞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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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간첩단 '일심회' 조직원 5명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80여 명의 방청객 중에는 20~30여 명의 민주노동당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방청객들이 일어선 가운데 재판장 김동오 부장판사 등 판사 3명이 법정에 들어서고 일심회 총책 장민호(구속)씨가 피고인석에 나왔다. 장씨의 모습이 보이자 방청석에서는 "와~"하는 격려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어 구속상태인 손정목.이정훈.이진강.최기영 피고인이 차례로 재판을 받는 동안 재판정에는 박수와 환호가 그치지 않았다. "질서를 유지해 달라"라는 재판부의 거듭된 요청은 묵살됐다.

민노당 지지자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일심회 조직원들은 자신의 친북 논리를 거침없이 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냉전적 의식을 갖고 있다" "나는 통일 운동가다" "사이비.짝퉁 간첩 사건이다" 등등.

이정훈씨가 법정에 나올 땐 "힘내세요" "사랑해요"라는 말과 함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이씨는 무대에 등장하는 연예인처럼 방청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까지 지었다. 소란이 계속되자 재판부가 방청객 한 명을 가리키며 일어날 것을 요구하자 민노당 지지자들은 "에이~, 그냥 넘어가시죠"라며 비아냥댔다.

오후 4시40분쯤, 다섯 번째로 법정에 섰던 최기영씨가 나갈 때 마침내 사단이 벌어졌다. 민노당 관계자 서모(32)씨가 일어나 "힘내세요"라고 크게 외쳤고, 참다 못한 재판부는 그에게 감치명령을 내려 법정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야, 이 X새끼들아" "미제 앞잡이들아, 지금이 파쇼 정권이냐" "그래 민노당원 다 구속시켜라" "두고 보자" 등 판사와 검사에 대한 욕설과 협박이 쏟아졌다. 재판부는 휴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20여 분쯤 지나 방청객의 질서유지를 책임지겠다는 변호인 측의 약속과 함께 감치명령을 풀고 재판을 끝냈다.

올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은 "독재정권 때 법정에서 노래 부르고 신발을 벗어 던지던 사람들이 지금 국정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 모습은 신발이 욕설과 협박으로 바뀌었을 뿐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법원의 권위도, 검찰의 수사도, 현행 법도 철저히 무시 당했다.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이런 행태를 포용.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눈감아줘야 할까. 법원도 이번 일을 한번쯤 되돌아봐야 한다. 폭력시위를 벌여도, 경찰관을 때려도 구속영장을 기각해 공권력의 권위를 실추시킨 결과가 '법정 난동'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지 말이다.

민동기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