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예고편 '눈길 팍, 느낌 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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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극장에 걸린 윤제균 감독의 코믹 사극 '낭만자객'예고편. '매트릭스'의 저 유명한 초록색 숫자가 흘러가는 화면이 깔리면서 외국인 성우의 영어 내레이션이 나온다. "로맨스… 액션… 코미디…."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이겠거니 무심코 보던 관객들, 칼을 든 자객 김민종과 최성국이 등장하자 와락 웃음보를 터뜨린다. 자세히 보니 초록색 숫자는 훈민정음이었다. 외국인 성우의 목소리와 우리 영화의 영상이 합쳐진 '퓨전 예고편'이란다.

올해 한 인터넷 영화사이트에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영화 티켓을 끊을 때 고려 대상 1순위가 예고편이었다. 예고편은 극장뿐 아니라 인터넷.모바일.지하철 TV 등까지 무대를 넓히고 있어 젊은 관객을 사로잡는 전진 기지가 되고 있다. 아이디어의 각축장이 되고 있는 영화 예고편의 달라진 경향을 알아본다.

◇튀지 않으면 죽는다

예고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개봉 두달 전쯤 공개되는 티저(Teaser) 예고편(평균 60초)과 한달 전후에 걸리는 본 예고편(평균 1백20초)이다. 이 중 티저 예고편은 튀는 아이디어가 집중돼 '예고편의 예고편'이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편집하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하이라이트 방식은 줄어드는 것 같다. 특히 한국 영화 개봉 편수가 많아져 첫 주말에 성패가 결정되면서 예고편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선생 김봉두''지구를 지켜라''황산벌'의 예고편을 만든 모팩 한동성 팀장의 말이다.

코미디 '불어라 봄바람'은 주연 김정은의 발랄한 목소리로 촬영 현장을 소개한다. 대사가 꼬이거나 둘이 라면을 먹다 김승우가 너무 웃긴 나머지 라면을 내뱉는 NG 장면을 틀어주기도 한다. '위대한 유산'도 김선아의 황당한 듯한 표정에 임창정이 폭소를 참지 못해 NG를 내는 장면이 티저 예고편 맨 뒤에 양념처럼 들어갔다.

사극 코미디 '황산벌'은 나당 연합군과 백제의 지도상 대치 상황과 창과 칼.불화살 등을 애니메이션으로 코믹하게 처리한 인터넷용 예고편을 선보이기도 했다. 내년 초 개봉하는 춤 소재 영화 '바람의 전설'은 영화 기획 과정에서 '춤에 미친 사람들'을 인터뷰해 만든 다큐멘터리를 예고편에 넣을 계획이다.

◇영화가 아니라 CF!

'위대한 유산'제작사 CJ 엔터테인먼트 이민희 대리는 "예고편은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광고를 찍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예 시나리오에 없는 새로운 장면을 제작하기도 한다.

공포 영화 '아카시아'가 좋은 예다. '아카시아'티저 예고편은 아역 배우가 누워있고 아이의 몸 위로 아카시아 나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용. '아카시아'관계자는 "공포물이라는 성격상 좀더 색다른 접근이 필요하겠다 싶어 시나리오에 없는 장면을 새로 찍었다"고 설명했다. '싱글즈'예고편에서 장진영.엄정화.이범수.김주혁 등 네 주연배우들이 침대 위에 앉아 어깨춤을 추는 장면도 따로 연출된 것이었다.

'지구를 지켜라'처럼 예고편 제작업체에서 영화사에 미리 원하는 장면을 주문하기도 한다. 모팩의 한 팀장은 "내년 초 개봉 예정인 스릴러 '페이스'는 이러이러한 장면을 넣을테니 촬영장에서 찍어달라고 부탁해놨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날고 기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영화의 완성도가 미흡하면 관객은 우수수 떨어져나간다. '선생 김봉두'의 제작사 좋은 영화 조윤미 실장은 "예고편이 영화보다 지나치게 앞서 갈수록 개봉 후 관객 감소율이 엄청나다"고 지적한다.

아기자기한 에피소드 위주의 코미디나 잔잔한 드라마는 '죽이는'장면이 없어 영화의 성격과 다소 차이가 나는 예고편을 찍는 고육책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의 눈은 속일 수 없고 영화를 보고 난 입소문은 발 없는 말보다 빠르다. 강렬한 임팩트와 영화 내용의 조화. 영화 마케팅 담당자들이 오늘도 골머리를 앓는 숙제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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