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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작가' 양지로 끌어낼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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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방송인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논란에 이어 유명 화가 겸 방송인 한젬마(37)씨가 대필 논란에 올랐다.

한씨의 최근작 '화가의 집을 찾아서' '그 산을 넘고 싶다'(샘터) 및 이전 베스트셀러 '그림 읽어주는 여자'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명진출판)에

대필 작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샘터사는 이에 대해 "기획출판일 뿐 대필은 절대 아니다"고 밝혔다.

한씨도 변호사를 선임해 "대필 의혹을 제기한 한국일보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21일 밝혔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이경희 기자

기획출판이냐 대필이냐

샘터사 측은 "편집자가 저자와 함께 자료조사를 하고, 교정.교열.윤문을 하거나 필요하다면 구성을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그 역할을 프리랜서 구성작가에게도 맡기고 판권에 명기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샘터사에서 나온 책의 판권 면에는 '구성 지OO'라는 항목이 있다. 샘터사 측은 "이 책의 구성작가 역할을 맡았던 지모씨에게 한씨에게 지급된 인세 10%와는 별도로 2%의 인세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한씨는 "취재를 다닐 때 구성작가와 동행했고, 직접 쓴 초고를 넘기면 구성작가가 고쳐주는 기획출판이었다"며 "이름만 빌려주는 대필로 몰아붙이는 건 부당하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이러한 '기획출판'이 하나의 출판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출판사에서 기획 아이디어를 낸 뒤 적합한 필자를 골라 콘텐트를 받아내 재구성.윤문 과정을 거쳐 책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저자 뒤에 숨은 '그림자 작가'

기획출판과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대필의 경우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출판사에서 사람을 붙여 저자의 구술을 받거나, 저자가 부하직원 등을 시켜 글을 쓰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출판인 A씨는 "교수나 기업인 중에서도 실제로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글이 안 되는 유명인 저자의 경우 대필은 부득이하다"며 "글재주는 없지만 콘텐트가 있는 전문가를 출판시장으로 끌어낸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어 대필을 무조건 배격할 일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미권의 경우처럼 '제2 저자'를 명기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필자를 밝혀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출판인 B씨는 "저자의 명성에 흠이 갈까봐 대필자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는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구성작가의 이름을 판권에 올리고 인세를 지급한 한씨와 샘터사의 경우는 오히려 관행에 비해 권리관계를 명확히 했다는 시각도 있다. 국내에선 '그림자 작가(ghost writer)'가 인세가 아닌 원고지 장당 얼마씩 계산하는 방식으로 고료를 받거나, 판권 정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판권 표기 투명해져야

우리 출판계에도 '그림자 작가'를 양지로 끌어낸 사례가 있다. 최근 출간된 방동규씨의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다산책방)의 경우 방씨를 취재한 조우석 기자가 공동 저자로 올라 있다. 또 책에 "방동규가 구술하면 조우석이 글을 쓰는 방식으로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도 명확히 밝혔다.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푸른역사, 2004)도 '임기환 기획, 이기담 저'로 콘텐트 제공자와 필자를 구분해 밝혔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잇단 대리 번역 및 대필 논란은 우리 사회가 투명해지기 위해 진통을 겪는 과정"이라며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책을 만드는 집단 전체에 대한 독자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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