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뉴라이트 교과서 = 절세영웅 이완용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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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 프로그램이 다룬 '뉴라이트 교과서'는 뉴라이트(신보수) 계열 단체인 교과서포럼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시안을 말한다.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유신체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데다 4.19를 학생운동으로 깎아내린 탓에 발표 직후부터 비판이 쏟아졌던 시안이다. 교과서포럼이 이 시안을 갖고 다음날 열려던 심포지엄은 4.19 단체 회원들이 행사장에 난입해 항의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호되게 혼난 교과서포럼은 발표 당일 밤 "대안교과서 시안은 뉴라이트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해명했고, 자유주의연대 등 뉴라이트 5개 단체는 "시안은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잡으려다 역편향의 오류를 범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과서포럼의 박효종 상임대표도 "앞으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좌.우 편향을 모두 벗어난 최종본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MBC-TV의 프로그램은 이런 경위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채 뉴라이트 교과서, 식민지근대화론, 친일파, 국내 메인스트림(주류), 일본 후소샤 교과서, 일본 우익을 모두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시각으로 일관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는 덮어씌우기식 역사인식이다. 교과서 시안에 대해 '그동안 숨어있던 과거의 망령이 학문과 과학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조선총독부 홍보 책자 내용을 보는 듯합니다'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심지어 '뉴라이트 교과서대로라면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근대화시킨 절세의 영웅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설명도 했다. 시청자의 반일감정에 기대는 전형적인 선정적 코멘트다.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인 이영훈 교수(서울대)는 "방송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필자도 뉴라이트 교과서 시안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시안이 그대로 교과서로 채택된다면 필자부터 나서서 반대할 것이다. 문제는 방송이 이 사안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TV가 아무리 주정(主情)적인 매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균형감각은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굳이 학문적으로 분류하자면 MBC의 '뉴스 후' 제작진은 전통적인 '식민지 수탈론'에 입각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약탈과 침략밖에 없었다는 시각이다. 이에 맞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식민지 시대를 근대적 경제성장의 기점으로 본다. 1990년대에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제기돼 학계에 거센 논쟁을 불러왔다. 둘을 절충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수탈론은 식민지 시대에 성장이 있었다는 점을, 근대화론은 그 성장이 조선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수탈론.근대화론 논쟁은 최근 몇년 사이 활발해진 식민지 시대에 대한 미시사.생활사적 연구 성과와 더불어 우리 학계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MBC 프로그램은 식민지 시대 일부를 긍정하는 입장을 '식민지 지배 정당화'나 '친일'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런 속에서 '뉴라이트 교과서대로라면 이완용은 절세의 영웅'이라는 엉뚱한 비약이 나온 것 아닐까. 지나친 단순화는 자칫하면 반(反)지성으로 흐를 수 있다.

하긴, 지청구는 MBC-TV에만 늘어놓을 일이 아니다. 다른 TV들, 그리고 필자가 몸 담고 있는 곳을 포함한 신문들은 올 한 해 단순화.비약.몰아붙이기 같은 오류를 범한 적이 없을까. 솔직히 말해 필자부터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그 점부터 반성해야겠다. 지금은 모두들 한번쯤 옷깃을 여미게 되는 세밑이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