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기술력 나이스"…중국 물도 관리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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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6월 어느 토요일. 중국의 유명 가전업체인 광둥 메이디(美的) 그룹 관계자 8명이 서울 서초동의 청호나이스 본사를 찾았다. 이들은 정수기 사업의 기술 파트너를 찾기 위해 방한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정휘동(48.사진) 회장이 "우리 회사도 한번 둘러봐 달라"고 설득해, 주말에 회동이 이뤄진 것이다. 정 회장은 요령있게 브리핑했고 그들은 다음날(일요일) 충북 진천 공장을 살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공장은 청호나이스의 핵심 공장이다. 국내에선 가장 앞선 자동화 시스템을 갖췄다.

공장을 둘러본 메이디 그룹 측은 한 달 뒤 "청호와 중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10년 동안 청호나이스에게 로열티(처음 4년 간 매출의 1.5%.나머지 6년은 1%)를 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중국 시장에 판로를 연 것이다. 정 회장은 "넓디 넓은 중국 땅에 우리 정수기가 팔린다는 생각을 하면 잠을 설칠 정도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자신을 '물관리 전문가'라고 말한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는 88년 미국에서 수질관리 최고 자격증인 CWS-V(Certified Water Specialist-V)를 취득했다. 국내 처음으로 따낸 것이다. 미국 환경관리 회사에서 일했던 정 회장은 91년부터 2년간 웅진코웨이 연구소장을 맡아 정수기 개발을 했다.

93년 청호나이스를 설립했다. 당시 정수기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90년대 초반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터져 물 안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힘입어 청호나이스의 출발은 산뜻했다. 정수기 판매를 시작한 건 93년 9월이었는데도, 설립 첫 해부터 이익이 났다. 회사설립 5년 만에 경쟁사를 따라잡고 정수기 매출 1위 업체로 올라섰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는 청호나이스 경영에 적잖은 타격을 줬다.

정수기 판매량이 급감했고 경쟁사의 판촉 전략에 밀려 쩔쩔맸다. 한 달에 2만원만 내면 정수기를 빌려주고, 관리도 해 준다는 경쟁사의 판촉 기법은 시장에서 힘을 얻었다. 3년을 버티다가 결국 2000년 렌탈 서비스 제도를 도입해 실지회복에 나섰다. 올 3분기의 렌탈 계약건수는 지난해보다 50% 늘었다. 하지만 한 번 내준 1위자리를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정 회장은 마케팅 싸움에선 졌지만 기술개발은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호의 가장 싼 정수기나 가장 비싼 정수기나 필터기능은 똑같다. 우리보다 깨끗한 물이 나오는 정수기가 있다면 돈을 더 주고 사겠다"고 덧붙였다. 최근 청호나이스는 기능을 강화한 신제품을 속속 선을 보이고 있다. 올 6월 중순에 출시한 '이과수 얼음 정수기'는 얼음도 만들면서 냉.온수가 나온다. 얼음(13g짜리) 12조각을 10분에 얼린다. 미국에 특허출원한 이 제품은 7~9월 1만1200여대의 렌탈 계약을 했다.

국내 정수기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정수기의 가정 보급율이 40%를 넘어서면서 렌탈 고객을 붙잡는 경쟁이 치열해졌다. 최근 정수기 업체들이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호나이스는 물과 관련한 사업을 다각화해 활로를 연다는 전략이다. 특히 가전업체와의 협력사업에 팔을 걷고 있다. 최근 청호의 자회사인 마이크로 필터는 국내 유수의 가전업체들에 필터를 공급하고 있다.그동안 국내 가전업체들은 미국산 냉장고 필터를 사용했었다. 공기청정기와 비데 판촉에도 팔을 걷었다. 한편 청호나이스는 유럽.미국.호주 등 세계 35개국에 정수기를 수출하고 있고 지난해 300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글=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닥치는 대로 살아야 어려움 이길 수 있다

'닥치는 대로 살아라.' 경기 화성시에 위치한 청호나이스의 연수원 입구에는 이런 글이 새겨진 돌이 하나 서 있다. 언뜻 보면 세련되지 못한 문구다. 정 회장은 이에 대해 "그 문구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며 그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문구는 친하게 지내는 한 최고경영자(CEO)가 들려준 말이다. 그분의 어머니가 100세까지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 말이 바로 '닥치는 대로 살아라'였다고 한다.100년 동안 살아보니 인생을 살다 보면 온갖 어려움이 닥치는데 그때마다 온 힘을 기울여 이겨내는 게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라는 거였다."

정 회장은 이 말을 마음속에 새겨 넣어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떠올린다고 한다.

회사 설립 당시 현대가의 일원인 친구가 사업 자금의 일부를 대줬는데 그 출자 내용이 밝혀져 외환위기 때 청호나이스는 현대의 '위장 계열사'란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정 회장은 그 친구의 회사지분 사기위해 수백억원의 빚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정면돌파를 해 어려움을 이겨내고 당장 어렵더라도 기술 개발은 게을리 하지 말자고 직원들을 독려한다"고 말했다.

청호나이스는 매년 매출의 7%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 그러나 정 회장이 엔지니어라 연구원들의 고충이 적잖다고 한다. 개발 기간이 길어지면 정 회장이 소매를 걷고 나서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부천의 연구소를 자주 들러 살핀다.

정회장은 "연구원들이 요령을 못 피우니 불편할 것"이라며 웃었다. 청호나이스는 정수기개발과 관련해 100여개의 특허.인증권이 있다. 그중 '자연하중 압력방식'이나 '얼음이 나오는 냉.온 정수기' 등이 청호가 내세운 대표적인 기술이다. 자연하중 압력방식은 정 회장이 사업 초기에 직접 개발한 것으로 정수기 물 저장 탱크에 이 방식을 적용하면 물이 쉼없이 순환된다. 탱크에 가해진 자연하중(압력)이 물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면 저장 탱크에 물때도 끼지 않고 탱크안의 물이 깨끗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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